사실 그냥 쇼핑 면피글임
욕망은, 대체로 설명 없이도 납득되는 감정이다. 누구나 욕망을 품고 살아가고, 어느새 그것에 휘둘려 행동하고 말까지 얹는다. 그래서 욕망은 오래전부터 철학자들과 정치사상가들의 단골 주제였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의 정치철학은 인간의 '정념passion'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씨름을 벌였다.
홉스에게 정념은 위험한 것이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자기 보존을 위해 정념을 따라 움직이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절대적 주권에 자신을 맡겨야 했다. 루소는 좀 다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정념도 공동체 안에서 길들일 수 있다고 봤다. 칸트는 이성과 도덕법칙으로, 헤겔은 인륜적 질서 속에서 정념을 해소하고자 했다. 이처럼 고전 정치철학에서 정념은 대체로 인간 내부의 에너지원이자, 사회적 제도를 통해 조율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정념을 조율하거나 억제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념을 시장으로 불러내어 유통시키고, 상품화하고, 순환시켰다. 그 결과, 욕망은 공동체 윤리나 도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소비로 직행하는 고속도로를 타게 된다.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이런 구조를 예리하게 들여다본 이였다. 그는 19세기 말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소비 행태를 관찰하며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들은 단지 필요한 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사치하고, 소비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지위를 말하려 했다. 여기서 소비는 생존이나 효용이 아니라 시선의 정치가 된다.
탐욕은 이 시선의 정치를 따라 증폭된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다, 라고 말해버리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 본래성을 구조가 증폭하고, 권장하고, 심지어 미화까지 하는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왜 어떤 브랜드에 끌리고, 왜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면 불안하고, 왜 무언가를 살 때마다 동시에 남을 의식하는가. 이 모든 질문 뒤에는 자본주의가 욕망을 어떻게 건드려 왔는가, 라는 구조의 문제가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결국 인간의 탐욕 때문이야.'이라 식의 말이 늘 공허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생각이었달까. 그 말로 모든 것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욕망은 통제나 억제가 아니라, 설계와 배치의 문제다. 정념을 길들이려 했던 계몽주의자들의 실패는 곧 자본주의가 그 정념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욕망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욕망을 다루고 살아갈 것인가. 정념을 길들이는 사회적 가르마타기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윤리나 도덕 이전에, 구조적 감수성과 설계의 문제다.
거창하게 사회학사 개론마냥 이 소리 저 소리 깔았지만 사실 이번 주 무신사스탠다드와 유니클로를 들락거린 내 삶에 대한 면피로 하는 소리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