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특별기획, <한국교회는 국우화를 극복할 수 있을까?>를 보고
최근 CBS에서 기획한 <기독교의 극우화에 대한 목회자 5인의 심층 인터뷰>를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이 더디어지고 나눠 먹을 파이가 줄어드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갈등들을 너무 쉽게 ‘극우화’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데에는 반대하는 편이다. 앞선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한정된 재화를 두고 부딪치는 장면들, 앞세대는 경제 성장의 과실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기에 먹고사니즘을 넘어서 보다 ‘고상한’ 가치들을 탐구하고 수출까지 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는 그것이 요원하게 느껴지는 데서 오는 분노와 박탈감이 있다. 이 감정들을 다 하나로 묶어 “극우화”라고 딱지 붙이는 건, 어떤 현실을 놓치는 일 같기도 하다.
다만 한국교회의 맥락으로 좁혀 들어오면 얘기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그리고 군사정권을 거치며 형성된 한국교회의 독특한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신앙과 민족주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겹겹이 포개진 그 공기 속에서, 교회는 우파 세력의 결집에 많은 사상적 단초를 제공해 왔다. 어찌 보면 교회는 ‘잘 동원될 수 있는 명분’이자, ‘수단’이자, 심지어 ‘결과’가 되어버린 셈이다. CBS 인터뷰 속 목회자들의 고민도 이런 역사적 배경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감사하게도 좋은 토양에서 자랄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선교단체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각각에게 계획하고 있는 ‘풍성한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풍성함을 어떻게 이웃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하고 배워왔다. 부족하지만, 그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온 것 같다. 감사한 일이다.
다만 나에게 늘 남아 있던 숙제는 ‘욕먹지 않는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늘 개신교를 대변해야 하고, 교회를 대변해야 하고,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은 그 강박이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하나의 신앙 실천으로서 나와 관계 맺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얼마나 좋은지”를 삶과 말로 전하고 싶다는 마음은 남아 있다. 이 신앙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더 다가가는 질문을 할 때,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오르막길 정도는 되어 보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그러던 중, SNS에서 우연히 케데헌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케데헌이 ‘데몬(demon)’이라는 단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악하고, 이는 사탄의 음모이며, 마지막에 나오는 사자 보이스의 “Your idol”이라는 가사가 아이들에게 주술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식의 글이었다. 특히 초반에 나오는 라틴어 가사를 문제 삼으며, 아이들에게 잘못된 주술을 가르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이없는 건, 그 라틴어 가사는 케데헌에서 새로 만들어낸 주술문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가톨릭 미사에서 사용되어 온 레퀴엠의 가사를 차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가톨릭은 적그리스도라고 할 셈일까. 이런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허탈한 웃음이 먼저 나온다.
이야기가 조금 샜지만, 그런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국교회 안의 정서를 떠올리게 된다. 생각보다 많은 기독교인이 “걱정과 위축과 두려움” 속에서 산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치든, 문화든, 교육이든, 어느 영역을 보아도 공통된 정서가 있다.
“영적으로 침식당하고 있다.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우리 아이들과 다음 세대가 서서히 잠식당하다가 어느 날 한 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내가 보기엔, 그 두려움은 몇 가지 층위를 가진다. 하나는 현실을 해석하기 어려운 시대를 견디기 위한 설명의 욕구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경제적·사회적 불안은 높아지는데, 그 복잡한 구조를 차분히 따라가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든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세력이 치밀하게 우리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서사는, paradox하게도 일종의 ‘정리된 세계’처럼 느껴진다. 혼란스러운 현실보다, 악의 음모가 지배하는 세계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또 하나는 신앙의 방어 체계화다. 원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성찰로부터 출발해 생활 전체로 번져가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은 안전, 저것은 위험”을 분류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신앙은 삶을 여는 힘이 아니라, 세상을 두려워하는 방패로 기능한다. 그 방패를 쥐고 있을 때만 내가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CBS 인터뷰에서 말하는 ‘극우화’도 결국 이런 두려움과 방어의 신학이 정치와 결합한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히 “저 사람들 이상하다”가 아니라,
이 세계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과 어떤 언어로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
그들은 세상을 과장해서 두려워한다. 나는 그 두려움이 과장되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두려움 자체가 허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이야기로 엮어 세계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은 여기에 닿는다.
보이지 않는 음모를 말하는 대신, 서로의 두려움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사탄의 전략을 먼저 떠올리기 전에, 하나님이 이 시대와 다음 세대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함께 묻고 들을 수 있을 때. 영상에서 김형국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신 것에 집중하며 기대하는 마음을 품을 때. 그때 비로소 “극우화”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앙의 다른 길이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