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가적인 삶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순진함의 유혹을 다시 생각해보며

by 호옹이


1. 순진함의 유혹, 다시 고개를 들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이자 작가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그의 저서 『순진함의 유혹』에서 이렇게 썼다.


현대 문명은 우리를 타락시켰고, 구원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말은 이제 하나의 격언처럼 기능한다. 현대 문명의 폐해—특히 환경과 생태의 영역에서 드러나는 각종 참상들—앞에서, 사람들은 '자연적인 것'과 '근원적인 삶'에 대한 희구를 점점 더 강하게 품는다. 그 흐름은 생태주의를 넘어, '공동체적 삶', '자족하는 생태적 생활', 심지어 '자연치유'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다양한 층위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한 취향이나 일시적 트렌드를 넘어서, 일종의 문명비판적 의식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


2. 종교 안의 유사한 흐름: 기독교 공동체주의와 생태신학

이러한 '목가적 환상'은 단지 2020년대의 흐름만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히피 문화의 영향 아래 비슷한 흐름이 자라났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시대를 전후해 서구의 좌파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입'한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이 흐름은 다양한 형태로 퍼져나갔다. 여기에 동양 특유의 순환 사상, 도교적 자연관, 불교의 선(禪) 사상 등이 결합하면서, 보다 잘 '현지화'되어 사회 곳곳에 스며든 것이다.


기독교 역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농촌으로의 귀촌, 자연과의 조화, 공동소유를 지향하는 삶은 이른바 '초대교회'의 삶을 이상형으로 삼는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소유를 팔아 나누는" 삶은 매우 '성경적인' 공동체상으로 비춰졌고, 이는 공동체주의와 생태주의가 종교적 정당성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한국의 경우, 1980년대 이후 민중신학과 생태신학은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민중신학은 도시 빈민, 노동자, 농민들의 삶에 복음을 접목시키려 했고, 생태신학은 기후위기와 생명윤리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흐름은 종종 경제적 현실에 대한 분석 없이 '가난함'이나 '자연스러움' 자체를 신학적 미덕으로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농촌 공동체 운동, 기독교 생협, 공동체 마을 건설과 같은 실험들은 초기에 큰 관심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지속가능성 문제에 부딪혔고, 외부 자본과 기술에 대한 의존을 배제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자급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이 흐름 전체를 일률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3. 삶의 구체성을 밀어내는 당위의 말들

사실 나 또한 20대 시절, 이러한 흐름에 공감하며 지냈던 때가 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공동체였고, 그래서인지 1년에 몇 차례는 '진보적'이라 일컬어지는 목사님들이 초청되어 설교를 하곤 했다. 당시의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대체로 '삶이 진실되다', '용기 있게 사신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한 경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큰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거부감이 들었던 설교가 하나 있었다. 우이동인가, 서울 외곽의 어딘가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목회자의 설교였다. 그는 강단 위에서 냉장고를 거론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냉장고가 왜 필요합니까? 불필요한 기계문명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둬선 안 됩니다. 신자유주의의 탐욕은 바로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나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과잉 생산과 소비,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파괴되는 환경과 공동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충분히 공감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 한마디에 내 마음 어딘가가 단단히 걸려버렸다. 그 무렵 나의 아버지는 당뇨병으로 투병 중이셨다. 혈당 수치를 맞추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인슐린 주사를 맞으셔야 했고, 그것은 냉장보관이 필수였다. 냉장고는 단순한 문명의 사치품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였다. 물론 그 설교자는 그런 개인적 사례까지 고려하면서 말을 한 건 아니었겠지만, 바로 그런 점이 문제였다. 구체적인 삶과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당위적 언설은 그 자체로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또렷이 느꼈다. (아버지는 몇 년 후 당뇨병으로 돌아가셨다.)


4. 보건의학의 유사 양상: 안아키와 자연치유 운동

이런 목가적 환상은 보건의학 영역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백신 거부, 항생제 회피, 전통요법에 대한 맹신 등이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아래 확산되고 있다. 이 역시 근대 의학과 기술에 대한 불신과 신화적 자연주의가 결합된 결과다.


특히 '안아키(약 안쓰고 아이 키우기' 운동은 이런 경향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백신이 자폐성 장애를 유발한다는 이미 여러 차례 반박된 주장부터, 백신 속 화학물질이 인체에 해롭다는 막연한 공포까지, 이들의 논리는 대개 과학적 근거보다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신념에 기반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 면역력 강화를 위한 각종 건강식품, 심지어 구충제까지 코로나 치료제로 각광받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단순한 개인적 선택을 넘어서, 극단적인 자기 책임론과 반지성주의의 토대 위에서 체계를 갖춰간다는 점이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개인주의적 구호는 언뜻 자유롭고 주체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공중보건이라는 사회적 연대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는다. 백신을 거부하는 개인의 선택이 집단 면역을 위태롭게 하고, 결국 백신을 맞을 수 없는 면역 취약계층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연치유에 대한 맹신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전통 의학의 가치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쌓아올린 성과—항생제, 수술 기법, 진단 기술—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자연스러운' 치료법만을 고집하는 것은 때로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 부모의 신념 때문에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5. 현대 문명의 성과에 대한 과소평가

이런 목가적 환상들의 공통점은 현대 문명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근본적인 과소평가에 있다. 백신 덕분에 사라진 소아마비와 천연두, 전기 덕분에 가능해진 야간 학습과 의료 장비, 글로벌 무역망 덕분에 한겨울에도 먹을 수 있는 신선한 과일들, 치안 시스템 덕분에 보장되는 개인의 안전, 통신 인프라 덕분에 가능한 원격 교육과 재택근무—이 모든 것들이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폭을 넓혀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흥미롭게도, 불교의 세계화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현실이 더욱 명확해진다. 부파불교의 체계적 발전은 아쇼카 대왕의 마우리아 제국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인프라 없이는 불가능했다. 대승불교의 전파 역시 쿠샨 제국의 실크로드 네트워크와 굽타 제국의 문화적 후원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화엄사상이나 선불교 같은 정교한 철학 체계들도 당나라라는 세계제국의 발달된 교통망, 번역 시스템, 학문적 교류가 없었다면 결코 성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현재의 '작은 공동체' 운동이 안고 있는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공하는 인프라—도로, 전기, 통신, 의료, 교육—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동시에 그 시스템 자체를 부정하는 '공동체 코스프레'에 머무르는 것이다. 진정한 자급자족을 추구한다면 도로도, 병원도, 학교도 스스로 만들어야 할 텐데, 실제로는 그런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은 기존 시스템에 의존하면서 겉으로만 '소박한' 삶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6. 목가적인 삶만이 진보를 담보하지 않는다.

작은 것이 아름다울 수는 있다.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친밀한 관계, 자연과 가까운 삶의 여유,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정신적 성숙—이런 가치들 자체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런 개인적 선택과 취향을 사회 전체의 대안으로 확대하려 할 때 발생한다.


공동체적 삶, 생태주의, 종교적 청빈은 충분히 의미 있는 개인적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 사회 전체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되려면, 치안, 교육, 보건, 분배, 재정 등 복잡한 사회적 기능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가 물리학자나 의사가 되고 싶어 할 때 그 꿈을 지원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 전염병이 돌 때 백신을 개발하고 배포할 수 있는 의료 시스템,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구호와 복구를 담당할 수 있는 행정 시스템—이런 것들까지 포괄할 수 있을 때만 진짜 '대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종교나 자연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잡하고도 불완전한 문명 그 자체가 진짜 희망의 기반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지만 계속 개선되어가는 시스템, 문제가 있지만 그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 노력하는 문명, 목가적이지는 않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사회—바로 이런 '비목가적 진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붙잡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 아닐까.


냉장고 속 인슐린이 생명을 구하고, 백신이 전염병을 퇴치하며, 전기가 어둠을 밝히는 평범한 일상. 그 일상이야말로 수많은 선대들이 쌓아올린 문명의 선물이자,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진짜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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