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예찬

feat. 봄의 전령사

by 대사랑 biglovetv

문제 1. 다음 중 가장 즐겨 하는(?) 집안일을 고르세요.

1. 화장실 청소

2. 음쓰 버리기

3. 청소기 돌리기

4. 빨래 널기

5. 설거지


이 문제가 수능에 나온다면 5번을 선택할 것이다.

보기 2, 3번도 근사치지만 나의 답은 설거지다.


문제 2. 당신은 언제 봄이 왔다고 느끼나요?(주관식)


단답형이 아니니 꽤 신중하다.

학생은 '숙제 없는 봄 방학'일 거다. '나는 자연인이다.'로 산다면 '두릅'도 유력 후보다. 입춘이나 경칩도 낄만하다. 매화 꽃망울이, 도다리 쑥국 향이, 만개한 벚꽃거리가 '봄의 전령사'라고 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문제의 답도 설거지다.


공사장 트럭이 지나가는 도로에 물을 뿌리듯, 설거지도 마땅히 준비가 필요하다. 눌어붙은 밥알은 골치니 미리 불린다. 동선에 맞춰 입이 큰 그릇부터 차곡차곡 쌓아 둔다. 찌개라도 먹은 날, 빨간 기름 가득한 냄비 속으로 그릇을 담그는 짓은 레드카드다. 고의적인 파울로 간주한다. 일이 두 배로 는다. 퐁퐁도 두 배 더 든다. 비친환경적 행동이다. 설거지를 해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다.

집게 종류는 팔 벌려 놓고, 수저는 한 곳에 '머리 박아' 시킨다. 명분 있는 얼차려다.


설거지는 나만의 음악수업 시간이다. 시작과 함께 음악을 튼다. 8비트 음악에 나의 설거지는 리듬을 탄다. 하지만, 어느 순간, 90년대 가요가 나의 메트로놈이 되어 버렸다. 익숙한 음악이 흐르면 독창회가 시작된다. 무릎과 발바닥도 박자를 맞추며 코러스를 한다. 콧소리부터 삑사리까지 다양한 음역대를 오간다. 가족 중 누구 하나 관심 없지만, 나만의 진지한 콘서트다. 김건모, 신승훈은 단골 음악 선생님이다.


다이소 1000원짜리 친환경 세제도 거품이 제법 풍성하다. 인공적인 라벤더 향에도 벌써 적응했다. 미끌한 감촉도 싸구려는 아니다.

거품이 많아야 설거지 맛이 난다. 어깨 들썩이며 차례차례 거품 목욕을 시킨다. 완벽한 준비 덕분에 진도가 잘 나간다. 나의 공연은 점점 더 메인이벤트로 향해간다. 분위기는 싸이의 흠뻑쇼에 버금간다. 그렇다고 절대로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십여 년 전 캠핑장에서 까불다가 거품에 숨겨져 있던 칼날에 엄지손가락이 깊이 패인 적이 있다. 지금도 흉터가 보인다. 칼을 씻을 땐 항상 칼날이 바깥으로 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었다. 절대로 까먹지 않았다. 상처는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모든 그릇과 수저들이 향긋한 회색빛 땡땡이 옷으로 갈아입으면 곧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광안대교 불꽃축제의 나이아가라 폭포가 시작되는 것이다. 가요톱텐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는 순간이다. '난 알아요'의 간주가 흐르고 회오리 춤이 몰아치는 찰나다. 헹구기가 시작된 것이다.


우아한 곡선을 이루는 수전에서 물이 다소곳이 쏟아진다. 거품 옷을 벗겨내기에 적당하다. 나의 손도 시원하고 부드럽게 감싼다. 한 여름밤 등목처럼 한참을 즐긴다. 전생을 의심해볼 만큼 나는 물을 좋아한다. 돌고래였나? 설거지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여기다. 기왕이면 찬물을 선택한다. 겨울에는 미지근한 물이 도움 되지만, 손에 혈색이 돌고 그 속에서 하얀 김이 피어나야 제대로 설거지를 한 기분이 든다. 아직도 러시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도시가스도 많이 올랐다.

나의 봄은 언제나 이 순간에 나에게 노크를 한다. 매일 하는 설거지인데 손등을 흐르는 찬물이 어제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시원하게 간지럽힌다. 팥빙수를 먹다가 갑자기 박하사탕을 쪽쪽 빠는 기분이다. 봄이 나에게 온 것이다. 많이 아프고 길었던 지난 나의 겨울이 끝난 것이다. 봄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온다. 설거지를 타고 온다.


나의 손길을 스친 젖은 그릇들이 건조대에 켜켜이 쌓여간다. 은빛을 되찾은 숟가락과 젓가락이 가지런히 건조통에 세워진다. 씻지 않은 그릇들이 아직 제법인데 건조대는 벌써 산이다. 설거지 실력은 이 장면에서 견주어진다. 아내의 솜씨는 명인급이다. 국자 하나 들어갈 틈 없이, 그릇들이 한 몸처럼 쌓인다. 신기하다. 공대 출신인 내가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았지만 공식이 따로 없다. 요령을 몇 번이고 들었지만 실전은 달랐다. 달리 고수가 아니다. 수제자 행세하며 다시 쌓아봐도 결국 똥 손이다. 그릇 깨지는 소리가 집안을 가르기 전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거품 가득한 수세미를 마무리하는 것으로 내 하루의 To Do List 하나가 삭제된다. 집안을 조금만 둘러보면 할 일은 다시 차고 넘치지만 가장 큰 산을 넘었으니 안심이다. 퇴근하는 아내를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다.


설거지는 이렇게 나를 많이 도와준다. 친구다.

내일부터는 핸드크림도 발라야겠다. 주부 습진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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