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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엄마

by 지망생 성실장

엄마는 무조건 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첫 번째 의무는 자식을 건강하게 기르는 것이고, 따라서 매일 자식에게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해주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매일 밥을 했었다. 한 끼는 급식을 먹어도, 저녁은 친정엄마를 이용해서라도 집밥을 먹였었다. 사실 돈이 없어서 사 먹이지도 못한 것도 있다.

냉장고를 탈탈 털면 먹을 것이 나오는데, 치킨 한 마리 2만 원, 짜장면 2만 원 간단하게 사 먹어도 1만 원 2만 원인데. 그땐 버스비도 없었으니까 외식은 라면뿐이 없었다. 그런데 2-3살 애들에게 라면을 먹일 수는 없으니까. 김치를 씻어서 미원을 넣어 볶더라도, 집 밥이었다.


그러다가

친정으로부터 멀리 이사 오면서, 육아 독립을 했다. 큰애가 초등 4학년, 둘째가 초등 1학년이었다.

친정 엄마 도움 없이

일을 하면서, 애들 밥을 차리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그래도 했다. 어떻게든 차렸다.

그런데 화가 나면 애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나를 발견했다.

애들에게 이렇게 못 되게 굴면서, 밥을 차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편에게 내 사업이니까. 나 주 2-3회만 7시에 집에 오면 안 되냐고 허락을 받을래도, 남편은 말로만 그러라고 하고는, 일 하다 보면 밤 9시 10시가 보통이었다.

그럼 애들은 아침에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을 때도 있지만

거의 라면 끓여 먹고, 뭐 사달라고 조르고, 나는 또 스트레스 스트레스가 쌓이고, 죄책감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돈! 냉장고에 재료들은 썩어서 버리고, 배달음식비는 따로 나가고. 돈이 이중으로 드니까. 너무 괴로웠다.


정신과 의사는 식세기를 들이고, 로봇청소기를 들이고,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

장사를 하면서, 남편 사장님을 모시면서, 그 많은 일을 하면서 당연히 힘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식세기, 로봇청소기, 가사도우미 모두 돈이 든다.

내가 일해서, 그만큼 돈을 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 모으려고 돈 벌려고 일하는데,

그만큼 돈을 쓰면, 내가 일하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버틸 만큼 버텼다.


그러다 정말 간만의 귀중한 시간이 나서, 둘째 친구 엄마를 만나 커피를 한 잔 했다.

오랜만에 같은 주부를 만나니 너무 좋았다.

그런데 그 친구 엄마가 충격의 말을 하는 것이다

"난 밥하고 요리하는 게 너무 싫어요. 시간이 아깝고, 재주도 없어서 맛이 없어요. 최대한 간단하게 어떻게든 간단하게 끝내요."


주부가! 밥하고 요리하는 것을 싫어해도 되는가?

나는 힘들다는 생각은 했지만. 요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다. 만들면 모양은 안 이뻐도, 어떻게든 맛은 있었고,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면 좋았고, 나도 먹으니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 엄마면 당연하게 요리를 좋아하고,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히, 요리를 싫어해도 되는 것인가?


그런데.. 싫어할 수도 있지, 못 할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싶더라. 요리 대신 애들하고 잘 웃고 놀고, 안아주고, 요리대신 청소를 더 깨끗하게 하고, 요리 대신 책을 읽어주고, 공부 숙제를 봐주면 그게 더 좋은 것 아닐까?


내가 요리하느라 힘들어서 애들한테 악 쓰면 그게 뭔 의미가 있는가

내가 설거지하느라 진이 빠져서 자는 애들한테 굿 나이트 뽀뽀도 못하면 애들이 좋아할까?

어차피, 내가 웃으면서 애들하고 놀고, 이야기하고, 요리하고, 설거지 하고 다 할 수 있는 체력이 없지 않은가?


그렇네... 엄마라고 꼭 직접 밥을 해서 주지 않아도 상관없네!


나는

나의 한계를 인지하고, 내 능력에 맞춰서 생활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을 했다.


때마침 직원 한 명을 자르고, 내가 더 바빠졌다. 남편에게 직원 자른 만큼 내가 더 바빠졌으니, 월급이든 생활비든 돈을 더 달라고 했다. 남편은 매우 좋아했다.

남편은 살림에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돈 버는 것에 에너지를 쏟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때부터 나는 밥을 안 하기 시작했다. 식세기를 샀고, 친정 엄마가 주 1회 집에 와주시기로 했다.

( 친정 엄마가 오는 것이 애들 정서에 더 좋을 것 같았다. 잔소리를 해도, 사람이 있는 집이니까 )

그리고 친정 엄마가 해준 반찬을 하루 정도 더 먹고,

나머지는 다 배달을 하기로 했다. 아예 반찬을 위한 장을 보지 않았다.


친정 엄마는 밥도 안 하는 엄마가 엄마냐고

자꾸 배달 음식 먹으면, 애들 성격이 포악해진다고 걱정을 하시지만

나는 일하는 대신, 배달음식 편하게 시켜 먹을 수 있는 이 돈의 여유에 감사해하며, 큰 죄책감 없이 일단 즐기고 있다.

아이들이 이제는 시켜 먹는 것 지겹다고, 엄마가 밥 해달라고, 할머니한테 반찬 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살림에 에너지를 쓰는 것을 줄이니

아이들에게 악쓰지 않아서 더 좋다.


엄마도 밥 안 할 수 있다.

먹는 것만 간소히 하고, 식탐만 없으면 생활이 간단해지고 돈도 절약된다.

한두 끼 굶어도 괜찮은 나이이고,

어차피 크면 다이어트한다고 할 테니 미리미리 연습시켜 놔야겠다.


그리고 여러분, 식세기는 꼭! 사세요. 6인용만 사도 엄청납니다.

건조기와 식세기는 정말 내가 사서 전 세계에 나눠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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