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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망생 성실장 Sep 21. 2024

비싼 추석 즐거웠다

이번 추석은 시댁 온 가족과 1박2일 여행, 야구경기 관람, 친정에서의 하루 종일 뒹굴거리기, 백화점에서 쇼핑으로 알차고 꽉 찬 연휴를 보냈었다. 


추석동안 하하호호 나름 즐겁고 편하게 지내고 가계부를 보니, 돈을 많이 쓴 것이 확인되었다.


누군가가 "여행가니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 현실로 오니 너무 힘들다" 라고 말하자

"여행가지 말고, 여기에서 하루에 20-30만원 쓰면서, 가사일 하나도 안하면, 현실도 즐거울꺼야" 라고 대꾸했다던데


그 말대로, 돈을 엄청 많이 쓰고, 놀고 먹고 하니 지낼만한 추석이 되었다.


******

1.

추석 여행은 남편이 기획한 것이다.

남편은 아마도 파킨슨병을 앓고 계신 시아버님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고, 며느리 사위 손주들까지 다 함께 하려면 명절 외에는 함께 쉬는 날이 없기도 하고, 더불어 설/추석마다 설거지 하나는 남편을 시키려는 며느리와 귀한 아들은 못 시킨다로 싸우는 시어머니와의 싸움도 피하고 싶었으리라 싶다.


시댁과의 1박2일은 나쁘지 않았다.

호텔에서의 편안한 잠자리와 푸짐한 저녁식사, 맥주 한잔, 호텔 조식과 이색적인 점심과 분위기 좋은 카페

빡빡하지 않은 일정이었고,

무엇보다

숙소나 식사나 그 누구도 흠잡으려 하지 않고 만족해하며 자리를 마련한 아들과 며느리에게 고마워했다. 


솔직히 부모님 여행 경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 큰 며느리로서 조금이라도 불만족을 표시했다면, 정말 많이 화를 내고 다시는 여행은 안 간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나 좋아하시고 고마워하시니 자식노릇 한 것 같아 뿌듯하긴 했다. 



2.

야구경기 관람은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야구팬인 남편 덕에 결혼 16년차에 기본 룰은 알지만, 찾아보거나 하는 팬은 아니다. 그런 남편이 좋아하는 편이 이번에 우승후보라서 남편은 매일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며 기대만빵인 것이다. 그런 남편에게 가을야구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 암표를 구해서라도 이번 추석 연휴에 꼭 야구장에 가라고 설득했다. 


남편은 비싼 야구표를 보며 주저하며, 가을 야구에 간다고 미루려고 했지만,

실제로 너무나 바쁜 남편이 가을야구를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표 구하는 것은 둘째치고, 남편이 시간이 없으니 확율이 너무 낮았다.

나는 남편을 많이 설득해서

둘째딸과 함께 셋이 야구장에 가기로 했다. 


날이 더웠으나 적당히 바람이 불어주었고, 좌석에 조금 그늘도 있어서 관람하기 너무 좋았다.

기대하던 술은 못 마셨으나

경기도 속전속결로 역전의 재역전을 하며 즐거웠다.


남편은 매우매우 즐거워했고 나에게 고마워했다.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남편이 즐거워하니 뿌듯했다.


3.

추석 당일 친정에 일찍 갔다.

종갓집인 친정은 원래 100명이 넘는 손님들을 모셨으나. 지금은 다들 돌아가시고 분가하여, 작은 할머니 할아버지 4분만 오신다. 친정 아빠는 사랑하는 외손주들에게 처음으로 우리집 제사를 보여준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예전보다 소박해진 손님들 규모와 음식에 조금 속상해하기도 했다. 

엄마도 힘들다고 뭣하러 오냐 하시면서도 외손주들이 본인 집처럼 편하게 드러눕고 애교부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좋아하셨다. 

사실 내 식구들은 친정에서 반나절만 있고 바로 집으로 가기 마련이었다.

시댁갔다 친정오면 피곤하고 힘드니 밥 한끼 먹고 바로 일어났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모처럼 시간 넉넉하게 먹고 자고 웃고 하니 효도한 것 같으면서도, 모처럼 내 본가에서 푹 쉬어서 그런지 에너지가 차는 기분이었다.


매우 뿌듯했다.


4. 

추석 다음날 여행, 야구, 친정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했는지 오후 4시까지 잠을 잤다.

정말 잘 잤다.

그리고 설거지라도 할까 했는데, 남편이 백화점을 가자고 했다.

사실 며칠 전에 남편이 나의 후질그레함을 못 참고, 백화점에 끌고가서 이옷 저옷을 입혀보긴 했었다.

하지만, 백화점 옷은 너무 비싸서 진짜 살 생각은 없었다. 사더래도 1벌 정도 살까 말까 하는 생각이었는데,

추석 당일 남편이 아울렛에 데리고 가서, 청바지 2벌과 맨투맨티 3벌을 사줬기 때문에 더 이상 옷을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결국은 날 끌고 백화점에 가더니 그 비싼 브랜드 옷을 척척 사주는 것이다.

정말 예쁜 옷이고, 내가 봐도 옷이 날개라고 중국에서 온 파출부 같은 외모에서 커리어우먼으로 바뀌어보이니 거절을 할 수 없었다.


작년에도 비싼 파카를 한 벌 사 입어서 올해는 더더욱 옷을 안 사려고 했는데, 결국 또 사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이정도는 입어야 외모가 산다는 것에

비싼 옷도 잘 어울린 다는 것에 매우 뿌듯했다.


5.

추석이 3일 지난 지금까지 설거지는 산처럼 쌓이지만

끝까지 밥을 안했고, 계속 외식만 하고 있다.

설거지 스트레스가 쌓이긴 하지만. 이렇게 밥을 사먹어도 빚이 안 생긴다는 것이 매우 뿌듯하다.



****


사람들이 나보고 돈을 쓰라고 했었다.

정신을 차리려면 돈을 쓰라고 했었다. 

하지만 쓸 돈이 없었다.

만원이 없었고, 오백원이 없었다. 다 몸으로 떼우고, 더러운 것 지저분한 것도 못 본 척 하고, 돈 써야 할 일에는 모른체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있다.

아니 남편이 돈이 있다고 한다. 적당히 써도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추석연휴, 적당히는 아니고, 해외여행 다녀온 만큼 돈을 써버린 것이다. 


돈을 막 펑펑쓰면 기분이 안 좋을 줄 알았다.

몸에 살이 떨어져나간 것 같이 속상하고, 막 망할까봐 불안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니 생각보다 즐거운 것이다.

결혼 16년 차. 정말 힘들게 아끼면서 살았는데

이제 이정도 호사스러움 가끔 한 번은 누려도 되는 것이구나 싶으니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다. 이래도 되나 싶다가. 이래도 되지! 싶은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빚이 아니라, 모은 돈으로, 벌은 돈으로 산 즐거움이기에 감사하고 뿌듯하고 당당한 것 같았다.

덕분에 대출 원금은 좀 덜 갚았지만......


하지만 좀 서글픈 것은 

돈을 써야만, 여행을 가야만 하하호호가 되는 명절이란 것이 좀 섭섭하다.

돈을 안 쓰고도 안 싸우면 더 좋을 텐데 말이다.

이번 추석에 쓴 돈이 아깝지는 않지만, 액수가 너무 크니 계속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으로 행복과 즐거움을 살 수는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돈을 버느라 그렇게 아등바등한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정말 기뻤다. 


하지만, 한 편으로 매일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더 깨달은 연휴였다.

역시 돈은 벌고 모으는 것이 더 재미지다.

쓰는 것은 벌고 모으는 것 만큼 재미진 것은 아니다. 

왜냐면 아직 매일 매일 그렇게 살 수 있을 만큼 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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