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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남자친구

by 지망생 성실장

언니랑 나는 늙어서 친해진 사이이다.

언니나 나나 성격이 대면대면했고, 옷을 나눠 입을 상황이 아니었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살기 바빴으니까.


그래도 평범한 자매들처럼 서로를 챙기긴 했다.

나는 동생들이 그렇듯이 언니를 따라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했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면 언니한테 이야기하곤 했다. 언니는 그때마다 귀찮아하기도 하고, 무뚝뚝하게 조언을 해주곤 했었다.


무뚝뚝한 언니가 날 아낀다는 것을 크게 깨달은 2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첫 번째는

엄마가 자궁근종 수술을 했을 때였다. 꽤 큰 근종과 자궁을 함께 제거하는 수술이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의사 선생님이 떼어낸 혹을 들고 와서 보호자에게 보여준다고 오라고 했을 때였다.

언니가 동생인 나는 어리고 예민하니 보지 말라고 해줘서 나는 안 갔었다.

후에 언니가 말하기를 혹이 주먹만 해서 너무 놀랐었다고 안 보길 잘했다고 해줬다.


두 번째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염을 할 때 모든 가족들이 보여서 염하는 것을 보라고 했다.

그때도 언니는 "너는 뒤에서 서있기만 하고 보지 마라"라고 해줬었다. 다른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무도 몰래 조심히 말해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배낭여행 다녀와서 동생도 꼭 보내라고 말해줘서 나도 혼자 배낭여행을 갈 수 있었던 일 등등

지금 생각해 보니 언니는 꽤 나를 챙겨줬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항상 받는 동생이다. 내가 감히 언니한테 조언을 할 것도 아니고, 언니는 알아서 잘하니까 도와줄 것도 없고, 지금도 항상 언니가 보내준 옷을 빤스부터 패딩까지 잘 입고 다니며, 국어학원원장님인 언니 덕에, 내 딸내미는 공짜 국어 수업까지 받는 중이다.


암튼

우린 사이가 좋은 자매에 가까운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내 남편과 언니의 사이이다.


언니는 결혼을 안 했고, 나는 벌써 15년 차 기혼녀이다.

내가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하는 바람에 언니가 받았어야 할 첫 손주의 이쁨이라던가, 기혼자식에 대한 챙김을 내가 알뜰하게 잘 챙겨 먹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언니랑 내 남편 사이는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없이

사이가 없다!


이건 내 잘못이 큰데, 결혼 전에 따로 언니와 남편을 만날 자리조차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는 나도 눈에 뭐가 씌었던 상태였고, 시간도 정말 없었어서, 별도로 언니와 남편의 만남의 자리를 만들지 못했었다. 나도 큰 시누는 만났었지만, 둘째 시누는 별도로 보지 않았었고......


암튼

그러다 보니

남편과 언니는

집에 남편이 인사온 날, 상견례날, 결혼식날 보고,

그 이후에는 부모님 생신 2번 명절 2번만 딱 만나는 사이인 것이다.

집안 행사에서 만나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뿐,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조선시대 내외하는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

우리가 술을 마시는 집안도 아니고, 고스톱을 지는 집도 아니고

남편이 말이 많기를 하나, 내가 중간 역할을 잘하길 하나.....


결정적으로

무엇보다 내가 남편 욕을 언니한테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것 같다.

결혼 전에 정말 예쁘고 당당하고 자신감 많던 나는

결혼하자마자 아줌마가 되고, 생활고에 찌든 살찐 짠돌이 아줌마가 되었는데

그 과정과 시집살이와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언니에게 고스란히 다 말했던 것이다.


미혼이기도 하고 동생을 아끼는 언니는

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동생 고생을 시킨 제부가 곱게 보이지 않았으리라.


지난번에 모임 때에는

남편이 슬쩍 언니에게 "처형 나 좀 잘 봐주세요"라고 말했는데

언니는 "내가 뭐라고요. 동생이 잘 살면 되지요." 라며 아~주 어색하게 웃는 시늉을 하면서 대화가 끝난 적도 있다.


모든 것이

중간에서 신랑욕을 많이 한 내 탓이기에 할 말이 없다.


언니가 기혼이라면,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면.

모든 결혼이 그런 거라고, 참는 거라고, 그 정도면 니 남편 평타는 된다고. 그 정도 시집살이는 다 하는 거 아니냐고 했을 텐데.

결혼을 안 해서 언니가 곧이곧대로 내 말만 듣고 남편을 너무 싫어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한 적도 있긴 한데.

결국은

내가 너무 솔직하게 남편욕을 해댄 탓이니... 다 내 잘못이다.


암튼

그런 언니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사실 언니의 남자친구는 생긴 지 몇 년은 되었다.

언니가 진작에 존재를 나에게만 ( 부모님은 막 결혼하라고 성화일 테니 ) 살짝 말해줬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언니가 너무 아까워서, 막 그런 남자 만나지 말라고 했었다.


특히 둘이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우리 언니가 아까웠었고, 언니가 만난다는 그 아저씨가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연애만 좀 하다가 헤어져라. 언니가 뭐가 부족하냐.

결혼은 하는 게 아니다. 엄마 아빠 수발받으면서 공주처럼 계속 살아라.

다 늙어서 남자가 똥 싼 변기 청소하면서 살림하고 싶냐. 그냥 연애만 해라. 등등


남편 있는 기혼녀라고 아는 체를 하면서 훈수를 두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니는 현재 몇 년째 비밀로 그 아저씨를 만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몇 해가 흘러보니

언니도 뭐가 그리 잘났나 싶고, 몇 년을 만나는 것을 보니

언니가 보기에 좋은 사람이니까 만나나 보다 싶고

그 정도로 좋으면 그냥 결혼을 하지 싶은 생각도 든다.

특히 언니가 아팠을 때.

동생(나)은 운전도 못하고, 부모님도 걱정하시니, 남자친구 불러서 병원을 다녀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래도 남편이 있는 게 좋은가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래서 내가 한 번 그 아저씨 보여달라고 말을 했다.

언니는 서로 가족들도 인사를 해야 하나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중간에 자기가 어색해서 고민 중이란다. 결혼을 결정한 것도 아니고 하니 더 어색하단다.


처음에는 아니! 그 아저씨! 먼저 만나게 해달라고, 내가 잘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야 하는 거 아닌가?

언니를 좋아하면, 예비 처가를 빨리 만나서 점수딸 생각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언니를 그만큼 덜 좋아하나! 싶어 화가 났지만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나이에 그분도 생각이 많으시겠지, 언니랑 결혼을 서두를 필요도 없는데. 인사를 한다면 날짜부터 잡자고 할 텐데,

서두를 일이 하나 없는 사이이니 시기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할래나 싶다.


무엇보다 언니가 이래저래 조금 부담감이 있어서 주저하는 게 보인다.




아저씨와 만나네 마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예전 언니 옛 남자 친구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내가 결혼하고 1년쯤 됐을 때. 그때 언니가 데이트하던 남자를 소개해줬었다.

나는 그때 정말 너무 생활고에 쪄들 때였고, 정말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다.

언니가 그 남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남자가 언니를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싹수없게 행동했었다.


동생주제에 언니 남자친구에게 "뭘로 먹고 살 거냐고, 돈은 얼마나 버냐고, 비전은 있냐고" 그런 질문을 막 했던 것이다.

나는

곱게 자라고, 부족함 없이 쓰면서 편안하게 잘 사는 우리 언니가

나처럼 생활고에 찌들고, 시집살이하면서, 고난한 삶을 배울 것이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결혼해서 가계부를 쓰고 살림을 하고 있는 '선배' 랍시고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대놓고 무례한 질문들을 막 쏴댔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언니가 그 남자랑 헤어지고 몇 년을 애인 없이 보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착잡했었다.


지금도 그 남자 직업을 생각하면 헤어진 것은 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언니도 미련 없이, 새로운 남자를 또 잘 만나 지금까지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있으니,

그 남자와 이별은 너무나 잘한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내 태도에 내가 반성을 한 것이다.


내가 언니 얼굴에 먹칠은 했구나

언니는 나와 다르니

돈이 없어도, 나처럼 돈돈 거리지 않고, 소박하게 사랑하며 사는 스타일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뭐라고 훈수를 두고, 남자를 재고, 평가하고, 헤어지는데 일조를 했을까.

라는 후회는 정말 많이 했다.


물론 언니나 그 남자나 둘이 정말 사랑했다면, 어린 동생의 훈수질 따위야 무시하고 사랑했겠지만.... 그래도 내가 뭐라고... 그리 잘난 체를 하며 돈돈 거렸을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 사람도 멀쩡한 남의 귀한 자식일 텐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많이 무거웠다.




빠르면 올해

늦으면 또 몇 년 뒤에가 될지도 모르지만

언니의 남자친구를 언젠가 보게 될 것이다.


다 늙어서 만난 사이가 드라마의 형부 처제사이처럼 살갑지는 쉽지 않을 것이고

언니와 제부 사이처럼

나도 형부 사이가 데면데면할 가능성이 매우 매우 높지만


그래도 이번에 언젠가 언니의 남자친구를 예비 형부감을 만나게 된다면

이전 같은 실수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의 바르게

언니의 눈을 믿고

언니의 감정을 존중하기 위해

우리 언니가 멀쩡하고 생각이 있는 사람인데

그런 언니가 몇 년을 만났다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겠지 하는 믿음으로

정말 예의 바르게 하려고 벌써부터 준비 중이다.


그런데... 그럼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까?

안건이랄까 주제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벌써부터 어색해서 죽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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