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관식이한테 잘 배웠다.

by 지망생 성실장

나는 남편을 미워했었다.


돈, 나만의 시간, 그리고 사랑(섹스)


내가 불만을 가진 것은 이 3가지였다.

부수적으로 온실 속의 고운 화초였던, 부평 산곡동의 전지현이었던 내가.

이제는 시장통 자움마가 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날 이뻐하지 않는 시짜 존재들을 평생 봐야 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내가 부부싸움을 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

결국은 3가지 요소였다.


정말 빤즈 한 장, 양말 한쪽도 돈 아까운 삶을 살았고,

병원비가 없어서 그냥 참은 적도 있었고,

버스비가 없어서, 눈치보면서 공짜 버스를 2-3번 탄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

결혼하자마자 애를 가졌고, 애가 나왔는데,

정말 말 그대로 단 5분도 남편 혼자 애를 본 적이 없었다.

여자애라 기저귀를 가는게 불편하다는 어록을 남기며, 이뻐하기는 했지만,

제일 힘든 갓난애기 시절부터 4살-5살까지 남편은 돈을 번다는 핑계로 정말 애를 하루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이 규칙적으로 의무적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 것은

둘째가 돌 무렵부터, 일요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였다

저녁먹고, 공원 한바퀴돌고, 다시 일을 하러 갔었다.

그러니 남편 혼자 애를 본 적은 없었다.


조금만 나를 신경써줬더라면, 적어도 한달에 5시간정도는 혼자 애를 보고, 나에게 휴식을 주었었을텐데.

남편은 그때 나를 신경쓰지 않았고,

나는 구체적으로 시간을 요구하지 못했다.

그땐 내가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기 전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랑(섹스)

사랑이 꼭 섹스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돈 벌고 애들 기르면서, 사랑을 속삭이거나,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볼 시간조차 없는 삶이었다.

그런 일상 속에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나는 섹스라고 생각했다.

한 10분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그런데. 남편은 그게 아닌 사람이었다.

식욕 성욕 모두 돈과 일에 갖다 바치는 워커홀릭이었다.

사랑은 한다.

하지만 표현할 시간이 없다.

기다려 달라.

성욕이 없어 미안하다. 근데 네가 더 이상하다. 참아라.

이게 남편의 대처였다.


남편의 모든 대처가 나는 마음에 안 들었고,

하나도 결과가 나오는 것이 없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랑한다며 이혼은 절대 합의해줄 수 없다고 하니,

사랑한다고 하니,

애도 있으니.

또 참고 참고

기회를 주긴 했지만.


나는 썩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17년이 되었다.


요즘에는 정말 남편과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절약하며 건강한 삶을 같이 즐기고,

같이 배달 다니면서 돈도 벌고,

넷플릭스 흑백 요리사도 같이 보고, 왕좌의 게임도 같이 보며 오붓한 시간도 즐기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거지?


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봤다.


어느순간 생활고는 없어졌고, 평범한 삶을 살 수는 있게 되었다.

애들이 크면서 자연스레 나 혼자만의 시간도 생겼으며,

육아나 살림에 대한 노하우(포기)가 생기면서, 일상에 체력의 한계가 오는 것이 거의 사라졌다.

그래봤자

돈과 시간 2개만 해결 된 것일 뿐

사랑(섹스)의 문제는 여전한데?


왜 사이가 좋아졌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편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폭싹 속았수다' 를 본 이후인 것 같다.


작년에 함께 '폭싹 속았수다'를 함께 보았었다.


그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인 관식이는 애순이를 정말 사랑해서, 시어머니 앞에서도 아내 편만 든다.

딸을 사랑해서 정말 딸에게 다 해준다.


남편은 그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울면서 "나 많이 배웠어" 라고 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

가족을 지키는 법을 배운 것이다.


시짜들하고 온 날 내가 이리저리 고충을 이야기하면, 정말 내 편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알아서 문제를 해결한다.

애들한테도 말로만 하는게 아니라,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들어주려고하고, 유머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한테 말을 이쁘게 한다.


예쁘다는 말도 자주하고,

고맙다, 다 당신 덕분이다. 사랑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00을 했다.

섹스 못해서 미안하다.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등등


간지러운 말을 정말 많이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관식이한테 제대로 배운 게 맞는 것 같다.


특히, 아빠 관식이를 보면서,

나도 장인어른의 소중한 딸인데 라는 것을 더 정확히 알게 된 후,

날 곱게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이제 일도 험한 일은 안 시키려고 하고,

자기가 더 많이 하려고 하고

내가 피곤해해도 핀잔 안 주고

내가 약 먹는 것도 관리해주려고 노력한다.


남편의 변화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그래도 나는 팔짱끼고 앉아서 애들 크고 이혼할 날만 기다릴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새

"에휴... 그래도 이렇게 이쁘다고 해주는 남자가 또 어디있겠누. 섹스는 그냥 야동보면서 풀면 되지, 죽을때 이 사람 옆에 있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게 된다.


말 한마디, 표현 하나가 이렇게 부부사이를 만즐 줄 몰랐다.


부부사이가 좋으니 웃음이 많이 나고,

가정도 화목해지고, 안정적이 되고

애들도 매우 구김살 없이 잘 자라게 되는 것 같다.


정말이지 남편의 변화가 감사하다.


결혼 17년 차

이제야 가족이 된 것 같다.

학교도 항상 전학다니고, 편입하고, 1년은 커녕 6개월 이상 다닌 회사가 없을 정도인 삶을 살았는데

내가 17년이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결혼과 가정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엄청난 성공인 것 같다.

이렇게 내가 프로젝트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모두 내 인연인 남편이 파트너이기 때문이겠지


그점에서도 정말 감사하다.


이제 앞으로 40년정도는 더 이렇게 가정을 꾸리고 싶다,

더욱더 나도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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