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
전화를 켜고, 친구 이름 석자를 검색한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춘다.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1시. 너무 늦은 아니 이른 시간이다. 너는 잠이 들었을 것이다. 아니 너가 깨어있더라도, 내 옆에 아직 한창 일을 하고 있는 남편이 있다. 전화를 한다면 모든 내용을 다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화기를 닫았다.
아침 9시 지금 너는 무엇을 할까? 출근을 해서 동료들과 아침 인사를 하거나,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설거지를 하고 있겠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할 시간은 아닐 것 같다. 바쁜 아침일테니.
나는 그냥 잠깐 잠을 잔다.
아침 11시 늦은 출근 길에 전화를 할까 생각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서 사무실에 간다.
그 5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내가 너와 전화를 한 것은 일년 혹은 2-3달 전이다. 어쩌면 오랜만의 내 전화를 받고 놀랄 너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출근길에 너가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말하고 좋은 하루 되라도 말하고 그냥 전화를 끝내면, 너는 의아할 지도 모른다.아무것도 아닌, 가벼운 날씨 이야기를 하기엔 너와 나 사이에는 너무 큰 공백이 있다.
오후 3시, 회사 업무에서 잠깐 숨을 돌리는 시간, 너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 하지만 너는 아마 회사에서 회의를 하거나, 업무에 한참 집중하거나. 또는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아이를 돌보거나. 학교에서 온 아이를 태우고 학원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또한 내 옆에는 남편이자 사장이 있다. 일 안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다.
"식충이."
남편은 종종 부지런하지 않고, 일 안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식충이 같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오늘 돈을 벌 수나 있을지 한치 앞을 모르는 하루를 살면서, 수다 따위를 할 시간은 나에게는 없다. 남편 사장에게 식충이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싫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모든 대화를 남편 사장이 듣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그냥 유튜브를 보며, 밥도 먹고, 잠깐 쉰다.
오후 7시, 퇴근을 하고, 잠바만 벗고 밥을 차리고, 밥을 먹이고, 애들 공부 숙제등을 봐주다보니 어느새 10시.
지금은 전화를 해도 될까?
하지만 아마 너는 사랑스런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다들 맛있는 밥을 먹고, 다 같이 청소하고, 씻고, 티비를 보며 뒹굴도, 책을 함께 읽으며 웃고, 다 같이 나란히 누워서 내일을 생각하며 잠잘 시간을 가질 것이다.
또 다른 너는, 아마 애인과 함께 맥주 한잔에 넷플릭스를 보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또 다른 너는, 먹고 씻고 밀린 회사일을 하며, 더 높은 연봉에 한 발 다가가고 있겠지.
그 누구도 나의 전화를 기다리거나, 기대하거나, 편안하게 받고, 오늘의 하루를 나눌 이는 없다.
깜짝 놀라고, 일을 방해하는 전화에 짜증을 내거나, 무슨 일이있나 불안해하거나.
또! 무슨 불평 불만을 말하려나 전화 안 받아야지 할 수도 있겠지.
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를 하고, 잠을 못자 뒤척이는 둘째에게 자라고 윽박지르며, 유튜브를 본다.
둘째가 잠이 들면, 마루로 나와 유튜브에 맥주를 마신다.
남편은 새벽 1시쯤 집에 들어온다. 라면을 끓여주거나. 밥을 차려주고. 회사와 아이들에 대한 내용을 보고한다.
남편이 밥을 다 먹으면, 나는 설거지와 뒷정리를 한다.
남편은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마무리하고,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와 쿠팡 플레이, 애플 티비를 돌리며 새로 볼 드라마를 고를 것이다.
나는 안방에 들어가 웹툰을 본다. 새로 나온 웹툰은 재미도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본거 또 보고, 또 보고, 벌써 3번 4번 정주행을 한 웹툰을 하루에 1개씩 보여주는 웹툰을 보다 잠이 든다.
꿈에서 나는 너를 본다.
세팅된 머리에, 기본 화장을 하고, 3센치 구두를 신고, 깔끔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안전한 곳에 아이를 맡기고, 회사에 갔다가. 6시 땡하면 집에 와서, 아이를 안고, 한번도 큰 소리를 안내고 웃으며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놀아주고, 그 와중에 틈틈히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본인도 씻고, 포근하게아이를 재우고, 일어나서, 책도 읽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내일 먹을 것을 꺼내놓고 깨끗하게 잠이 드는 너를 본다.
그리고, 깜짝 놀란다.
너의 곁에도 남편은 없다. 나는 감히 남편이 함께하는 일상을 아예 상상조차 못하는 구나.
아니면 내가 꿈꾸는 미래 자체가 남편이 없는 미래를 꿈꾸는 것인가...
꿈속에서 너는 주말에는 친구를 만난다. 아이는 아이대로 잘 논다.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가벼운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 어색하지 않고, 선을 넘지 않고, 근황을 전하고, 공감도 받고, 조언도 주고 받는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피상적이다. 꿈 속 화면에 인물들이 입을 뻥긋거리고 자막에는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한다] 라고 적혀있다.
나는 이제 대화를 못 한다.
회의 같은 대화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싫다. 싫다. 싫다고!!
소리를 지르다가 잠에서 깬다. 남편이 귀를 막고 돌아서며 중얼거린다.
'왜 맨날 싫데. 뭐가 그리 싫으냐. 먹고 사느라 다 그렇게 사는거야 에휴'
나는 쇼파에 나가서 담요를 덥고 잔다. 그래 가족을 위해서건, 너 자신의 즐거움과 너의 명예를 위해서건, 돈 벌어서 딴 데 쓰는거 아니니까. 돈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 너는 죄가 없지.
돈버는 남편 뒷바라지하고, 애들 건사하고, 집안 살림하면서, 돈 버는 남편 도와서 맞벌이까지 해야 하는 나 자신이 잘못이지. 체력이 약해서 짜증이 나고 화가 나고 하는건 내 건강 관리를 안한 내 탓이지.
내가 멍청해서, 옷 한벌 안 사입고,
화장한번 안하고,
친구들 10년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그건 모두 체력이 약하고, 머리가 약삭바르지 못하고, 멍청하고 우둔한 내 탓일 뿐,
남들은 나처럼은 안 살더라고.
그런데 남들은 나처럼 외롭게 애를 기르고, 맞벌이하고 안 살더라고,
남편이 바빠서 워커홀릭이면, 돈을 쓰고,
남편이 연봉이 조금 낮으면, 살림을 도와주더라고.
나는... 뭐냐...
능력없는 남자를 만난 것은 내가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야하나...
아...
너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 그냥 모르겠다. 대화가 필요하다. 입다물고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빙빙 같은 생각속에 갖혀있다보니 진짜 이러다가 미칠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런 대화를 누가 좋아하겠니
너에게 전화를 하고 싶은데
너는 ... 아니, 아니야. 너는 없다.
나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유튜브를 켠다.
텐션 끌어올려~! 하는 김호영을 보면서
속으로는 부럽지만, 내 무표정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