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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소리 Jun 19. 2023

 5살에 학교에 간 아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 나는 오빠들과 함께 동네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매일 숨바꼭질이나 자치기 같은 놀이를 하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라곤 노는 것뿐이었으니까. 나보다 세 살 위인 막내 오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공교롭게도 동네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이 모두 초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갑자기 동네에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는 나를 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만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 오빠들은 지역에서 가장 명문이라고 여겨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집에서는 좀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오빠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걸어서 40분 넘게 걸리는 그 학교에 나를 입학시켰다.     

 

“너 이제 학교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태어난 지 5년도 채 안된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혼자서 등하교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오빠들을 따라서 학교에 가고, 수업이 끝나면 교문까지 마중을 나온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앉아 아버지 등에 매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어쩌다가 일찍 끝나거나 아버지가 조금 늦게 오는 날이면 무서워서 아버지가 올 때까지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한 달 남짓 어린 학생을 돌보던 담임선생님은 이 어린 학생과 계속 함께 하기는 어렵겠다고 결단을 내렸던 것 같다. 어느 날, 안에 서류가 들어있는 노란 봉투를 주며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했다. “너 이제 학교에서 쫓겨나게 생겼다.” 아버지가 봉투 안의 종이를 읽기를 기다리던 나에게 통보하듯 말하던 아버지의 표정과 말투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나는 오빠들과 헤어져서 집에서 좀 더 가까운 학교로 다니게 되었다. 오빠들은 똥통 학교 다닌다며 나를 놀려댔다. 그 학교는 가는 길이 어렵지 않고 집에서 가까워서 혼자서도 잘 다녔고, 나보다 한두 살이 많은 반 아이들은 나를 막냇동생 대하듯이 놀이에 깍두기로 끼워서 같이 놀아주었다.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나는 아무리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가도 늘 반 아이들보다 나이가 어려서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는 아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로 늘 우울하고 타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심리상담 분야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나를 아프게 한 것은 어린 시절 나를 너무 이른 나이에 학교에 보내서 위축된 사회생활을 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는 나 자신을 못나게 여기는 게 너무 아파서 그저 다른 누군가를 탓하고 싶었고, 마음 가는 대로 실컷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했다. 아버지가 어린 나를 돌보는 것이 귀찮아서 내던지듯 학교에 보내버렸다는 해석에 기반하여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였다. 그렇게 한번 아버지를 탓하기 시작하니 아버지가 나에게 못되게 하고 힘들게 했던 기억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다. 내 인생은 아버지 때문에 망한 것 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나 자신이 못나 보여서 우울해하고, 그 모든 원인을 아버지에게 돌리며 담을 쌓고 지낸 세월이 20년 넘게 흘렀다. 그 20년은 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해지기 위해 애쓰면서 보낸 세월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제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한 채로 아버지 영정 앞에 앉아있던 나에게 큰오빠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 말이 그동안 아버지를 향해 다가가려고 노력했던 나의 힘겨운 여정을 송두리째 모래성처럼 무너뜨렸다. “네 6살 때 학교 보내 달라고 얼마나 고집을 부렸던지, 아버지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학교를 보냈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통을 파고 고집을 부리는 건 나도 처음 봤다.”    

 

"그래도 그렇지, 유치원도 있는데 어떻게 만 5세도 채 안된  어린아이를 학교에 보내"

   

  ‘내가 고집을 부려서 보낸 거라고? 아버지가 나를 돌보기 귀찮아서 학교에 보내버린 게 아니라고? 그럼 난 여태 뭘 한 거지?’ 충격이었다. 내 기억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고 어이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모든 생각을 차단하고 회피해 버렸다. 20년 넘게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리겠다며 열심히 해왔던 모든 노력을 어디서부터 다시 정리해야 할지 생각조차 하기 었다. 나중에, 나중에 하자. 그렇게 묻어 두고 지나온 시간이 어느덧 8년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이제는 조금씩 꺼내어 마주할 용기가 생긴 걸까.     


“나중에 생각할래.”   


  내가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조금 늦게라도 자전거에 나를 태워 학교 정문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어느 날은 열이 아직 남아있는 내가 기운이 없어 달리던 자전거에서 땅으로 떨어지자 일으켜주'그것도 꽉 잡지 못하고 넘어지냐'며 핀잔을 주었다. 그때 넘어지면서 다친 손가락의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어린 딸이 남들에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하며 어떻게든 학교에 결석하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던 아버지의 넓은 등에 기대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가던 그날의 기억은 내가 가장 아끼는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컷으로 내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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