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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소리 Jun 20. 2023

나는 매일 아지트로 퇴근한다

신개념 부부의 신박한 라이프스타일


   나는 어디를 가나 늘 '아지트'를 만드는 꿈을 꾼다. 실제로 최근 제주에 이주하기 전까지 2년간 가족이 사는 아파트의 옆동에 나만의 아지트를 세로 얻어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거주한 적도 있다. 유별난 아내의 성향을 이해한 남편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퇴근길에 가족이 사는 집에 들러서 남편이 준비한 저녁을 함께 먹고 다시 내 아지트로 귀가하는 희한한 생활을 우리 가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우리의 별거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의 친구들은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별거하는 우리 부부의 실험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내 친구들은 앞다투어 내 아지트에 방문해서는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들의 로망이라며 부러움을 집안 가득 쏟아내고들 돌아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솔직히 드러내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들을 보면서 '부부가 각자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는 것이 일상에 휴식과 활력소가 될 수 있겠다'는 해석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은퇴하고 주부로 살고 있던 남편은 내가 출근하고 없는 낮 시간에 내 아지트에 와서 방정리와 청소를 해주고 나서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타임을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가끔은 내 아지트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그럴 때는 약간의 설렘이 느껴지기도 했던 걸 떠올리면서 그곳이 우리 둘 모두에게 좋은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내가 꿈꾸는 아지트의 모습은 나름의 조건이 있다. 커다란 창이 있고, 창 밖에는 나무, 풀, 꽃 같은 자연의 싱그러움이 보여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는, 그야말로 멍 때리기 좋은 그런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켜서 글을 며, 내가 좋아하는 핸드메이드 작업까지 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간을 누가 나에게 제공해 준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장소를 만들어서 누리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내가 꿈꾸는 그런 분위기의 공간이라면 나 말고도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할 테니까.               


          


# 나무위키가 제공하는 아지트의 의미

1. 비밀결사나 공작원들이 비밀 작전 수행을 위해 작전 지역 내에 마련한 소규모 접선 장소를 일컫는다.

2. 이러한 근거지를 아지트라고 부르면서, 이 의미는 점점 확장되어 비밀결사나 공작원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개인적으로 즐겨 찾거나 자주 머무르는 장소를 은유적으로 아지트라 부르기도 하게 되었다.


# 다음 사전이 제공하는 아지트의 의미

1. 비합법적 활동이나 혁명 운동의 선동 지령 본부

2. 사적 모임의 집회 장소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도 내 아지트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걸까?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면, 아지트를 생각할 때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던 시골집 내 방의 모습이다. 나무 창틀에 창호지를 발라놓은 창문을 열면 지붕까지 타고 올라간 포도나무 넝쿨 아래로 접시꽃이며 봉숭아꽃, 무화과나무와 석류나무 열매가 계절마다 익어가는 아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 옆에 놓인 내 나무 책상에 기대어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책상에 앉아서 나는 밤이 새도록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일기를 쓰거나 의식의 흐름대로 낙서를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내가 가진 감성의 9할 이상은 분명 그때 키워졌으리라. 갱년기를 맞은 이 나이에도 늦은 밤까지 깨어있는 습성이 남아있는 것은 고집스러운 그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긴 후에 부모님은 정원이 있는 그 단독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고, 자연스럽게 내 방은 사라져 버렸다. 내 일기장, 내 책상, 내 창문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일의 심각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가끔씩 그 시절 내 방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걸 보면, 그 공간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게 된다.    


   내 무의식은 그 시절 내 방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이 그리운 나머지 그런 공간이 있으면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내가 간절히 원한다면 그것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서히 선명해지는 나의 욕구의 정체성이 한동안 잠자던 나의 도전 본능을 슬금슬금 흔들어 깨운다.



#별거아닌별거부부 #자유로운부부생활 #따뜻한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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