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글로벌 리딩 기업에 대한 갈증으로

성공적인 LED TV 출시에도 첫 이직을 결정한 이유

L전자에서의 첫 실전, 그리고 '선진구매'에 대한 갈증

L전자 TV사업부 구매팀에서 약 1년 반 정도 일하면서 여러 성과를 낼 수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LED TV 시장이 런칭되던 당시, 경쟁사와의 기술 싸움 속에서 원가 구조를 돌파해낸 일이다.

당시 경쟁사는 ‘엣지형’, 우리는 ‘직하형’ 기술을 적용해 시장에 진입했는데,

두 방식은 구조상 원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 엣지형은 TV 테두리에 LED를 배치하고 도광판을 통해 빛을 분산시키는 구조라, LED 광원 수가 적고 PCB 크기도 작아 상대적으로 저렴한 원가 구조였다.

- 반면, 우리가 적용한 직하형은 TV 패널 크기에 따라 LED를 직접 배치해야 하기에 PCB 크기도 커지고, 원재료 단가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에서도 이 구조적 차이를 알고 있었지만, 기술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전략에 따라 우리는 직하형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원가 절감은 구매팀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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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에 간 중국 출장, 원판업체와의 협상

TV 출시는 이미 일정이 정해져 있었고,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
우리는 PCB업체로 납품되는 원재료의 단가를 낮춰야 했고, 이를 위해 2차 협력업체와 직접 협상을 하기로 했다.
설 연휴에도 불구하고 파트장님과 함께 중국으로 출장을 떠났고, 현지 원판업체와의 미팅을 통해 신제품 물량을 집중 배정해주는 조건으로 납품 단가를 절감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이와 동시에 1차 벤더(PCB업체)도 함께 지정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도록 연결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마케팅 전략상 불리한 구조임에도 목표 원가를 맞춰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다.

이후 L전자도 경쟁사의 엣지형 설계를 채택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다른 기술, 다른 마케팅 전략으로 시장에서 2강 구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이 있다.

웹툰이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고, 그 속에서 내가 담당한 제품이 세상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과 보람을 느꼈던 시기였다.



선진구매에 대한 갈증

그런데 마음 한 켠에는 늘 갈증이 있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빅블루’라 불리며 업계에서 가장 구매를 잘한다고 평가받던 미국 I사는 국내 대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었고, L전자 CPO도 I사의 아태지역 구매 대표를 스카우트하며 조직 변화를 추진하던 시점이었다. 기존에는 단순히 사업부 오더에 따라 원가를 관리하던 구매조직이, 그 이후에는 독립된 통합구매조직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ERP와 구매시스템이 도입되었고, 파트넘버 기반의 품목 전산화, 공급망 협업, 이력 추적, 단가 통합 등의 시스템이 속도감 있게 구축됐다.

그러나 동시에, 논리 없이 실적을 맞추기 위해 가격을 강제로 깎는 구조는 여전히 존재했다.
겉보기에는 선진구매의 틀을 갖춰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힘에 의한 구조적 한계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빅블루’로 옮기게 되었다

마침 그 시기 I사에서 경력직 채용 공고가 떴고,
운 좋게 인터뷰를 통과하면서 인생의 첫 이직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뭔가 인생이 잘 풀리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ㅎㅎ)

당시에는 2년도 채우지 못한 경력으로 이직을 고민했지만, 협력사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실적을 내는 방식에 회의감이 깊어졌고, I사에서 선진구매의 원리를 직접 배워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2010년 12월 31일,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첫 번째 이직을 결심했고, 거대한 한국 대기업에서 더 거대한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돌아보니, 잘한 선택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선택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I사에서 11년을 일하며 겪은 조직문화와 업무 방식은 이후의 커리어 전체에 영향을 주었고, 실제로도 시장은 점점 I사가 하던 방식에 가까워졌다. 특히, 입사 초기부터 인상 깊었던 점들은 다음과 같다:


글로벌 전략 연계
– 전 세계 담당자들이 일관된 레버리지 전략을 공유하고, 동일한 프로세스로 공급망을 관리한다는 점

신뢰 기반의 자율 문화
– 위계적 보고보다는 업무 그 자체에 집중하며, 근태나 형식보다 성과 중심의 분위기

철저한 문서화, 매뉴얼화
– 별도의 OJT 없이도 문서를 숙지하면 업무가 가능하고, 그 과정에서 경험이 쌓여 전문가로 성장


이후 스타트업, 외국계, 국내 대기업까지 다양한 곳을 경험해봤지만, 정말 아끼는 후배가 있다면, 사회생활을 외국계에서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 이유는 바로, I사에서의 11년이 내게 남긴 것들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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