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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Nov 14. 2019

기다림의 연속인 보통열차가 주는 느림의 미학

세키쇼선(石勝線) 첫 번째 이야기

  홋카이도는 삿포로 뿐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모든 유동인구는 삿포로로 집중되는 것 같고, 실제로 유동인구만 봐도 삿포로 외의 역들은 삿포로역의 반도 못 따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삿포로와 연결된 노선이 아니라면 간선철도와 지선철도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비록 특급열차가 지나가는 노선이라고 할지라도 열차 빈도가 높아서 수시로 맞은편에 열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열차를 타면 또 느낌이 달라지는 노선이 있다. 한 개 역을 나아가기도 버거울 정도로 많은 열차를 통과시키는 구간. 세키쇼선의 이야기다.


세키쇼선의 노선도. 중간에 마주하는 노선이 제법 되는 사통팔달한 노선이다.


  세키쇼선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위치가 좋은 노선이다. 이 노선은 특이하게 본선과 지선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지선은 유바리 지역만을 거쳐간다고 해서 유바리 지선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노선은 불과 몇 개월 전에 폐선을 알린 안타까운 일이 있었기에, 이제 세키쇼선도 본선 지선으로 나눌 필요가 사라져 버렸다.


세키쇼선 열차의 실질적인 출발역인 치토세역


  노선이 갈라져 나오는 곳은 미나미치토세역이지만, 보통열차는 그 전 역인 치토세역부터 운행을 시작하고 있다. 그 노선 외에도 중간에 오이와케역에서 무로란 본선과 한 번 교행이 이루어지고, 노선의 끝인 신토쿠역에서는 네무로 본선과 연결이 된다. 그러니까 삿포로와 홋카이도 동남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키쇼선을 운행하는 원맨열차.


  그러나 정작 세키쇼선에 위치한 역들은 승객들의 선택을 많이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 그러다 보니 여느 시골 노선과 마찬가지로 원맨열차만 운행 중에 있다. 물론 열차 빈도가 그렇게 많지 않다 보니 열차 시간표 확인이 필수적인 열차 이기도 하다.


이제는 유바리가 아닌 신유바리역까지만 운행하는 보통열차.


  원래 이 열차는 유바리역까지 운행하던 열차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유바리역까지 열차 운행을 하지 않으므로 유바리 지선 구간이 시작하는 신유바리역까지만 단축 운행을 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세키쇼선 전 구간을 운행하는 보통열차는 없는데, 뒤에 나오는 글에서 언급하겠지만, 세키쇼선은 유바리 지선이 시작하는 신유바리역을 기준으로 볼 수 있는 열차도 달라지고, 역 간격도 상당히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직선구간이 상당히 많은 세키쇼선.


  이 열차는 아주 짧은 거리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운행하는 것으로 시간표에 나타나 있는데, 사실 열차가 속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꺾인 구간이나 눈에 띌 정도로 경사가 심한 구간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신칸센에 버금갈 정도로 쫙 펼쳐진 선로가 상당히 인상적이기까지 한 노선이다.


달리는 열차는 원없이 속도를 내고 있다.


  직선과 평지. 즉,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으니 열차는 신나게 달릴 수 있다. 그 어떤 시골 철도의 열차에 비해 속도를 많이 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이 열차가 달릴 수 있는 시간보다 다른 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훨씬 길다.

  열차는 비록 달리고 싶지만, 보통열차라는 이유 때문에 그보다 높은 등급의 열차가 갈 때까지 그저 양보만 할 수밖에 없다. 세키쇼선이 단선 철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누군가는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데 그 모든 희생을 보통열차가 떠안고 가기 때문에 운행 소요시간이 엿가락처럼 길어지는 것은 당연해져 버렸다.


특급열차와 같은 구간을 운행해서일까? 보통열차는 운행시간만큼이나 긴 대기시간을 가진다.


  같이 달리고 싶은 보통열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지나가버리는 특급열차. 이 열차를 보면서 과연 보통열차는 무슨 생각이 들까? 열차가 한 대 정도만 지나가고 그 이후에 다시 자신도 달릴 기회가 부여된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세키쇼선에서는 한 대만 보내고 출발한다는 보장이 없다.


한 역에서 두 대 이상의 특급열차도 심심찮게 보내는 보통열차.


  한 대의 열차를 보내고 꽤 시간이 지났지만, 열차는 미동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방향으로 특급열차를 모두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신호등이 길어도 이렇게 길 수는 없다. 만약 도로였다면 운전자가 크게 항의하고도 남았을 일이 세키쇼선에서는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긴 시간 역에 머물러주는 열차 덕분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주변 마을을 느낄 기회를 부여받은 것도 행운이다. 특히나 열차 빈도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낮은 곳이라면 접근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한다는 기분을 가지면 이보다 더 낭만적인 여행코스가 있을까?


역이 아닌 곳이라고 해도 아랑곳 않고 특급열차를 보내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그렇게 한참을 정차했던 열차는 출발하고 또 얼마 가지 않아서 이번에는 선로에서 또 하염없이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를 기다린다. 열차 간격이 약 30여 분 정도 되는 특급열차가 아주 짧은 거리를 두고 두 대나 통과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보통열차에 오른 승객들의 표정에는 이 또한 당연한 일인지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마을만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열차도 시간이 멈춰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세키쇼선의 보통열차. 시간에만 쫓겨서 바쁘게 목적지만을 향해 달리는 특급열차 사이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천천히 그것도 너무나 천천히 다녀주는 보통열차가 있기에 승객들은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 인생도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닐까? 돌아보면 결국 제자리인데 무엇이 그리 급한지 옆을 돌아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세키쇼선의 보통열차는 주변을 돌아보아도 결코 늦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생에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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