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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Dec 31. 2019

선을 넘을 듯 말 듯 바다와의 밀당이 심한 서부 노선

산인선(山陰線) 첫 번째 이야기

  교토에서 우리나라 동해안(일본에서는 일본해라고 부른다)을 거쳐 시모노세키까지 이어지는 산인선. 그 길이만 670여 km이며, 소속 역만 16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웬만한 간선철도보다 규모가 큰 이 철도는 산너머 세토내해를 끼고 있는 산요선과도 항상 비교가 되는 철도이며, 구간에 따라서는 간선철도라고 부르기에 너무도 어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골 철도 포스팅에 무슨 간선철도가 등장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산인선 만큼이나 시골 철도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철도도 보기 힘들다. 비록 교토나 돗토리 등 대도시 주변을 지날 때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춘 모습도 보이곤 하지만 산인선의 매력은 우리나라에 가까워질수록 그 빛을 더 발산한다.

  산인선은 크게 해안가와 위태위태하게 붙어가는 구간,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구간, 중소형 도시를 잇는 구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훨씬 더 다양하게 나눠볼 수 있지만, 반대편의 산요선 구간과 비교가 될 정도로 교통 발전이 되지 않은 이 구간은 마치 복선 전철화로 망가지기 전 경전선과 동해남부선을 이어놓은 것처럼 느껴져서 향수에 젖어들 때가 있다.


산인선의 대략적인 위치. (구글 지도)


산인선 실제 노선도. (위키백과 일본어판)


  산인선은 교토에서 우리나라 동해안을 끼고 이어지다 혼슈 섬의 끝인 시모노세키에서 마무리된다. 같은 시모노세키에서 출발해서 남쪽의 세토내해를 끼고 오사카를 거쳐 교토로 이어지는 도카이도, 산요선과 너무도 다른 느낌이다. 도카이도, 산요선은 신칸센으로 인해 열차 빈도가 급감하긴 했으나, 여전히 큰 도시를 끼고 움직이기 때문에 승강장이나 열차나 승객으로 가득하고, 열차 길이도 제법 긴 데다가 비전철 구간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같은 간선 철도 명목으로 만들어진 산인선은 비전철 구간은 물론, 단선 철도 구간도 상당히 많다. 하루에 열차 운행 편수가 다섯 손가락을 채우기도 힘든 구간이 있는가 하면, 나름 구색을 갖춰서 통근열차까지 다니는 구간도 있는 등, 같은 산인선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풍경을 자아낸다. 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 색깔까지 바꾸는 카멜레온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산인선과 산요선의 마지막은 시모노세키역이다.


  산인선의 서쪽 시작은 시모노세키역으로, 이 역에서 더 서쪽으로 이동하면 혼슈를 벗어나 규슈로 접어들게 된다. 그 반대편의 하타부역에서 실질적으로 산인선과 산요선이 나누어진다.


산인선은 처음부터 바다와 함께 시작하지는 않는다.


  전철 구간이 이어지는 산요선과 달리 산인선은 시작부터 비전철 단선 구간으로 이어진다. 지도 상에서 보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바다와 함께 이어지는 것은 아닌 산인선. 바다로 가기 전에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듯 오히려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 등장하는 것도 참 이채로운 광경이다.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산인선 풍경.


  그런 모습도 잠시, 산인선은 본격적으로 바다와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아찔한 거리를 유지하며 동쪽으로 이동해 나가고 있다. 워낙 가깝게 붙어 있는 경우도 많아서 마치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도 여러 번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가깝게 있으면 파도도 더 선명하게 보여서, 바다의 생동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매력이다.


바다를 보며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산인선 구간.


  산인선이 시골 철도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도시 속에 갇혀서 빌딩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풍경에서 벗어나 끝을 알 수 없는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폭포수처럼 당장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수평선을 따라 상상 속의 모습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풍경이 이어져서 또 새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그림. 그래서 바다가 지속되는 이 풍경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다는 항상 한결같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조금 잠잠할 것 같으면 또 일렁이는 파도는 멈춰 있는 듯한 시골 마을에도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파도가 치는 소리는 깊은 정적에 빠져있는 산인선 주변 마을에 하나의 음악을 울려 퍼지는 것처럼 메아리친다. 거기에 디젤 열차의 웅장한 엔진 소리가 더해져서 자연스럽게 자연과 인공의 오케스트라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산인선은 이 바다와 밀당하듯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반복하며 이어진다.


  바다에 떠 있는 듯, 또 멀어지는 듯. 그렇게 자유자재로 풍경을 바꿔가며 나아가는 산인선 차창. 한결같아 보이지만 또 다름이 느껴지고, 다른 것 같지만 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그래서 예상이 불가능한 노선. 산인선은 마라톤처럼 긴 여정이지만, 그 순간순간을 보면 또 100m 달리기를 보는 듯 긴장감도 한껏 고조된다.


승강장에서도 충분히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산인선의 역.


  달리기를 하면 중간중간에 음료를 보충할 수 있는 장소가 있듯, 산인선도 중간중간에 바다와 가까이 붙어있는 역들로 인해 허기진 마음을 보충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사람은 없지만, 전혀 공허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곳. 그래서 산인선은 또 오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노선이다.

  보이는 것은 빈 공간뿐이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자꾸 내 마음을 채워주는 곳. 그것이 바로 자연과의 상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산인선은 도시에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시골 단선 철도에 불과하지만,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이 노선에 몸을 던지면 그에 대한 보답은 엄마의 마음처럼 한없이 퍼주기만 한다.


동적인 바다와 달리 정적인 어촌마을.


  이곳에 열차가 없었다면, 마을 주민들은 무한정 반복되는 파도 소리만 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열차가 다니면서 울리는 소음과 철의 마찰음이 파도의 음색도 바꾸면서 똑같다고만 느끼는 울림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아무리 시끄러운 디젤 열차가 지나가더라도 불평불만 없이 이렇게 다 흡수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열차의 종류가 달라지는 경계역인 이즈모시역.


  그렇게 디젤 열차만 볼 수 있었던 산인선의 서부지역은 이즈모시역을 기점으로 새로운 열차를 수용하게 된다. 정확히는 이 전역인 니시이즈모역부터지만, 실질적인 특급열차의 시작은 이즈모시역이기 때문에 산인선에 큰 변화는 여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산인선 구간 가운데 유이하게 전기 설비를 갖춘 철도를 볼 수 있는 구간이 이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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