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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방랑객 Jan 26. 2020

열차를 다 수용할 수 없는 승강장이 있는 노선

후라노선(富良野線) 이야기

  일반적으로 열차가 정차하는 승강장이라 함은 가장 긴 편성의 열차까지 안전하게 승하차가 가능할 정도의 시설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승강장 규모가 과하게 큰 우리나라의 역을 볼 때, 승강장이 너무 길어서 이상하게 보이는 역은 많아도 승강장이 열차보다 길이가 짧아서 이상하게 보이는 역은 여태껏 보지 못했다.

  그런데 후라노선의 역에는 열차보다 짧은 승강장이 있는 역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일본 시골 열차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인 원맨열차를 알면 금방 이해가 될 수 있다. 


원맨열차에서 볼 수 있는 문구.


  원맨열차는 말 그대로 한 명에서 운행을 하는 열차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한 명은 운전사를 지칭하지만, 이 운전사가 역에 정차하면 역무원이 되기도 하고, 승무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역과 역을 운행할 때까지는 운전사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역에 정차하면 다른 일까지 도맡아서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운전사의 역할은 역에 내리는 승객의 승차 요금을 받는 역할(역무원의 역할)과, 열차 내 안전을 관리하는 역할(승무원의 역할)까지 부여된 것이다. 원맨열차로 운영하는 구간은 그만큼 승객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열차는 1량 편성이지만, 간혹 열차 편성이 2량이 넘는다고 하더라도 승하차 시 운전사를 거쳐가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타고 앞으로 내리라는 문구도 같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승강장은 그에 맞춰 맨 앞 출입문이 열리는 곳 정도만 있더라도 승객이 충분히 승하차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또한 역에 승객이 거의 없는 곳이어야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후라노선은 익히 아는 관광지가 많다고는 하지만, 평소에는 원맨열차만 다닐 정도로 승객이 많이 없는 전형적인 시골 노선이었던 것이다.


조촐한 승강장이 대부분인 후라노선.


  후라노선의 역은 대부분 1선 1승강장 형태로 되어있으며 대부분 무인역으로 운영 중이다. 우리나라였다면 이미 폐역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역들은 몇 안 되는 승객을 위해 이렇게 유지하고 있다. 그것도 예전 시설을 그대로 놔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선로 보수도 하고, 승강장을 새로 리모델링을 하는 등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역이 끝나는 지점에 철도 건널목이 있는 경우도 많다.


  승강장이 열차를 다 수용하지 못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지만, 철도 건널목이 역과 바로 붙어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상행선이나 하행선 중 일부 열차는 본의 아니게 정차하면서 철도 건널목을 침범해서 정차하는 내내 차량의 통행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승강장을 벗어나 철도 건널목까지 가로막은 열차.


  철도 건널목은 열차가 진입하기 전부터 도로를 차단해서, 열차가 이곳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계속 차들을 묶어놓는다. 차들은 열차가 그냥 통과만 해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도로에 묶여있게 되지만, 정차까지 해버리게 되면 그 시간은 더없이 늘어나게 된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우리나라였다면 분명 민원이 수시로 제기되어 이런 형태의 역이 없어졌을지도 모르지만, 후라노선 인근 주민들은 이 상황도 운명인 듯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운전자는 체념한 듯 열차가 통과할 때까지 경적도 울리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모습이 참 애처롭게 느껴졌다. 때로는 열차가 들어와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주어진 상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일본에는 열차 사진을 담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철도 건널목이나 열차가 잘 나올법한 곳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이 모습을 감안해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열차가 오랜 시간 머물러 준다면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여유 있게 열차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승강장을 더 길게 만들었을 법 하지만 후라노선은 그렇지 않다.


  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실해 보이는 승강장. 더군다나 승강장은 다니고 있는 열차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 역으로 인해 역세권 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루에 몇 대 되지 않더라도 계속 운영을 하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노선도에서는 큰 규모의 역과 같이 하나의 역의 지위를 얻고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이 역이 어떤 큰 역보다도 더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교행역이어도 승강장은 너무도 짧게 느껴진다.


  후라노선은 규모가 큰 비에이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인역으로 운행 중이다. 열차가 정차하지 않으면 역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 역이 있어서 후라노선 주변 마을 사람들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철도가 꼭 빠르고 크고 새 것이 될 필요는 없음을 보여주었다.


정차해있는 열차, 그러나 뒤쪽 차량은 승강장과 거리가 멀다.


  시골 철도라고 하기에는 2량 편성 열차가 꽤 자주 다녔던 후라노선. 다행히 열차에도 승객들이 제법 있어서 노선이 없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중간역은 여전히 승객이 없어서 운영에 많은 애로사항이 많다. 그러나 인건비를 아끼고, 시설을 최소화해서 추가로 들어가는 유지비용을 줄여나간 결과, 열차 길이보다 작은 승강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후라노선의 시작과 끝은 중간역과 달리 승강장 폭이 상당히 길다.


  물론 승객이 많은 후라노선의 양 끝 역들은 승강장이 열차를 수용하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로 큰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역이 일관성 있게 클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 후라노선. 철도 운영은 항상 그 시기에 맞춰 유연성 있게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일본 시골 철도가 살아남아가는 방법을 보면 가장 우선시되는 것이 바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일본 철도의 그물망 같은 노선이 계속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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