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나릿빛 사진의 추억>
-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가 살고 있는 방의 곰팡이 낀 더러운 벽에서 한 폭의 벽화를 읽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 존재의 의미를 재는 내 속의 저울 눈금을 조정하고 나자 찾아온 것은 마음의 평화였다.
<호텔 유로, 1203>
- 잘 생각해.
결혼이란, 환불이 매우 까다로운 쇼핑일 뿐이야.
좀 더 눈부신, 다른 사람 눈에도 괜찮아 보이는, 그런 쇼핑을 하라고.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유선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린 흐리멍텅한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삶은 이렇게 날카롭게, 파도처럼 끊임없이 맨 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 금요일 저녁이었고 대부분 연인들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는 키가 작고 지나치게 말라서 볼품이 없었고 여자애도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연인의 얼굴에 천천히 담배 연기를 불어 보낸다.
담배 연기가 여자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발암 물질로 가득한 연기 속에서 여자는 행복한 듯 웃고 있다.
연기 속에서 웃고 있는 여자는 볼이 붉고 맹해 보인다.
남자가 순간 뺨을 세게 때리더라도 여전히 여자는 웃고 있을 것 같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버리는 감정의 알러지 상태 같은 거니까.
-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 내는 게 인간이더라.
<성스러운 봄>
- 말해질 수 있는 건 고통이 아니야.
아픔을 표현할 수 있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거야.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 "사는 것도 지랄 맞은데 동화마저 아파야 돼?
무조건 해피 엔딩이라야 해."
- '쿨' 하다는 건 제 외로움도 남의 마음의 서걱거림도 읽을 줄 모르는 불치의 병을 이르는 것일 뿐.
난 좀 더 끈적이며 질퍽이며 절룩거리며 걷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