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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껏 속고 살았던 것인가

내가 시청한 기후변화 (다큐멘터리 '성장이라는 거짓말' 시청 소감)

Written by 리나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남들은 찬란한 청춘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던 20대 초반의 시절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달고 다녔다. 취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했던 때에도 많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빨리 승진하고, 집도 주식도 많이 사서 부자가 되어야 성공한 삶이라는, 감히 반발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그 당연한 목표를 그냥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같이 팍팍한 일상을 간신히 견디어 내고 있음에도 그 목표의 근처에도 못 간다는 생각이 들자,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라는 결론에 도달해 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기후위기. 매년 반복되는 미세먼지와 폭염, 그리고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장에서 보이는 그 절대 줄어들 기미가 없는 쓰레기 더미들. 역사는 진보한다고 들었는데, 사회가 발전하면 다 같이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왜 삶은 더 피곤해지고 주변의 환경은 더 오염되어 가는지. 이상했다. 게다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성장이라는 목표 달성은 과연 가능한 것이기는 한 건지, 그러니까 과연 만족할 만한 성장이었다는 목표 달성의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아주 강한 의심이 들었다.


이러한 의문과 의심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막연히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이 다큐멘터리 “성장이라는 거짓말(2020)”를 보자 그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였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면 이미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인류는 성장이라는 최종 실현 불가의 목표를 향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

산업혁명 이후 근대화에 성공하여 고도로 성장해 왔다고 하는 지금의 선진국들은 사실 그들만의 힘으로 성장을 이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식민지를 산업과 경제 발전을 위한 자원과 인력의 출처로 삼았다. 동시에 식민지를 그들의 시장으로도 만들었다. 이로써 선진국들은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물건들을 만들어 냈고 다시 이들을 식민지에 판매하여 엄청난 이윤을 냈다. 부자가 된 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부를 유지했고, 이제 과거에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많은 국가들이 똑같이 사용하고 있는 공식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공식을 써먹을 수 있는 식민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물리력을 통해 식민지를 만드는 대신, 선진국이 옳다고 주장하는 제도, 법, 금융 체제를 누구나 따르게 함으로써 새로운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다. 첨단 IT 기술을 무기로 플랫폼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들이 외국 시장에 진출해서 해당 국가의 사람들이 그 플랫폼 손바닥 안에서 놀도록 하는 것도 ‘식민지화’의 또 다른 얼굴이겠지.


식민지 공식은 그렇다 치자.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가장 근본이 되는 자원 사용의 한계에 대해서는 뾰족한 답이 없다. 자원 고갈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부터 귀가 따갑게 들어왔더랬지. 깨끗한 물과 공기, 흙, 나무와 같은 자원들은 머나먼 우주에서 지구에 무한 공급되는 자원들이 아님에도 인류는 마치 화수분을 갖고 있는 것 마냥 사용했다. 

눈부신 과학 기술로 자원 고갈 문제도,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문제는 이것들이 주장에만 그치고 실제로 제대로 확실하게 증명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설사 과학 기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술이 개발되어 상용화되기 전에 환경 파괴가 더 빨리 더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과는 동일하다. 다큐멘터리에서 언급된 기후 위기 해결 기술 중에 하나가 탄소포집 기술이었는데, 이것 역시 수많은 성장론자와 기득권자들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있지만 사실상 실현 가능하다고 증명된 바는 없다. 또한 재생에너지만 있으면 기후위기가 단박에 끝날 것처럼 이야기 하지만, 재생에너지 설비를 개발, 제작, 설치하는 데에는 또 에너지가 사용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에너지 사용의 총량은 다시 늘어나고, 재생에너지가 기존 에너지를 대체해서 온실가스 배출을 0으로 만들기 전에 기후위기 저지선인 1.5도씨 기온 상승이 발생하고 말 것이라고 다큐멘터리는 지적한다. 결국 계속 성장하면서 동시에 기후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도박이나 다름없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 실제로 증명되어 성공한 예가 한 번도 없었고, 가능성만 믿고 지금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다가 실패했을 때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끝”인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그 누구도 ‘축소(decrease)’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다큐멘터리 속의 한 청년이 말했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너무 많은 것은 탈이 나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는 그래서 탈성장(degrowth)이 이 시점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탈성장이 모든 활동을 멈추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성장하는 것을, 모든 성장의 지표를 GDP로 삼는 것을 멈추자는 것이다. 대신 지금까지 쌓아 놓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돌고 돌던 부를 세상에 나오게 하고 좀 더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에 대해서 말해 보자는 것이다. 전 세계 상위 10%의 부자가 갖고 있는 부의 7%만으로도 전 세계의 빈곤을 “영원히” 끝낼 수 있다는데, 이것을 쥐고 놓지 않으려는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고 다큐멘터리는 언급하면서, 뉴질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GDP 대신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발전의 새로운 지표로 삼겠다고 발표했다는 뉴스도 더한다. 탈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현재에도 논의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돈이나 이득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은 다음에야 우리는 성장을 논할 수 있고 불평등 개선을 위한 사회복지를 논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탈성장은 결코 급진적이거나 파격적인 논의가 아니다. 그냥 자연 생태계의 일부인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뿐이다. 다만 기존의 자본주의와 성장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지난날의 관습을 떨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복잡한 논의처럼 보이는 것이겠지.


내가 즐겨 듣는 법문을 하는 한 스님께서 지금의 자본주의 문명은 종국에는 끝이 나게 되어 있다고 몇 년 전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정말 믿기 어려운 우울한 이야기였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끝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며 많이 우울하게 생각할 것도 아닌 듯하다. 스님은 단지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점을 깨닫고 그렇게 담담히 말씀하셨을 뿐이다. 이제 그 한계점과 모순점을 알게 된 이상, 그리고 매일을 이 잘못된 시스템이 만들어낸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가 할 일은 명확하지 않을까. 생각의 전환, 즉 그동안 당연하다고 믿었던 체제와 문명에 대해 한 번쯤은 깊이 의심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후 위기 대응의 진정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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