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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새미 Apr 10. 2020

그리움을 그려낸 이중섭의 편지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에서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고 도쿄 제국 미술학교와 문화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화가 활동을 시작했다. 함경남도 원산으로 돌아온 후에는 해방을 맞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전쟁으로 제주도,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했고, 전쟁 직후에는 통영, 서울, 대구 등을 전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6년 만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945년 5월 해방 직전 문화학원의 후배였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가슴 아픈 이별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7월경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후이다. 그는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가족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곧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다정다감한 편지들을 많이 썼다. 특히 두 아들을 염려하며, 그림을 곁들인 사랑스러운 편지들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1955년 중반 이후 점차 절망 속으로 빠져들면서 편지를 거의 쓰지 않았다. 심지어,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이중섭은 극도의 좌절과 정신적인 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1956년 서울 정릉 골짜기에서 친구인 작가 한묵과 함께 지냈다.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 간염 등으로 인해 매우 피폐한 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제작했다.


식민지, 전쟁, 분단 등으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를 어우르면서도 이중섭은 끈질기도록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한없이 암울한 현실을 자조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가난한 피란시절에도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순진무구한 작품들을 그려내는가 하면, 전쟁 후에는 강렬한 의지와 자신감으로 힘찬 황소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표현에 충실한 '정직한 화공'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후 사기로 인한 빚에 시달렸고, 경제적 생활고 속에서 '거식증'을 동반한 정신적 질환으로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만 했다. 결국 쓸쓸하고 애잔한 작품들을 뒤로한 채 홀로 생을 마감했다.


<춤추는 가족> 이중섭(호 대향) / 출처 네이버 미술 백과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안심하시오.

가난해도 끄떡없는 우리 네 가족의 멋진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서로 참으로 사랑하고, 더욱더 사랑해서, 하나가 되어 올바르게,
힘차게 살아봅시다.

진심으로 나를 믿고 기뻐해 주구려.
화공 대향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실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테니
끈기 있게 기다려봐 주오.
남덕의 귀여운 모든 것을 힘껏 안고 입맞춤을 보내오.
사흘에 한 번은 편지를 받고 싶은데... 보내주기를.

가난한 삶이었지만, 부정하기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다렸던 이중섭.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던 그가 가족을 그리워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편지와 그림들은 가슴 아프다 못해 쓰라리다. 


'황소'처럼 굵고 강렬한 그림 뒤에 외로웠을 그의 삶과 가족을 사무쳐 그리워하며 살았을 마음에 따뜻한 포옹을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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