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분류와 정리를 완료했다. 이 단계는 재료준비를 끝낸 상태와 다름없다. 보통 우리는 재료준비 후에 요리를 시작한다. 이제 하면서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다. 하면서 한다는 것은 우리가 더딘 성장을 하게 만든다. 언제나 한국 교육의 폐해로써 1순위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주입식 교육이다. 수업 한 번 듣고, 문제 반복해서 풀기. 풀다 보면 대충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그 상태. 우리는 1등급의 방법으로 배우면 안 된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애들은 이런 과정 없었어도 눈으로 쓱 보고 마치 그 분야에서 3개월 일한 사람처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계속 반복되는 실수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았는가? 실제로 행동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상상으로 해보는 것이다.
실제 해보기 전에 상상, 즉 시뮬레이션을 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것은 바로 내 기준과 객관적 기준의 차이를 빠르게 맞추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총을 쏠 때, 영점사격이란 것을 한다. 영점사격의 목표는 물론 목표지에 정확히 3발을 맞추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3발을 쏴서 3발이 가장 밀접하게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3발을 한 자리에 맞추기만 하면 조준선의 위치를 바꿔 그다음 사격부터는 정확히 목표지를 맞출 수 있게 된다. 다른 예로는 각 브랜드마다 다른 신발 사이즈를 예로 들 수 있다. 같은 사이즈 250일지라도 이 브랜드는 발볼의 크기가 작게 나와 255를 사면 맞는다던지 하는 것들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영점을 맞추게 되면 자연스레 다음에 같은 브랜드를 살 땐 255를 주문하게 될 것이다. 내 기준에서는 250이지만 그 브랜드의 기준에서는 255이므로 255로 구매하는 것이 우리가 영점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수를 안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점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면 실수라는 단어 자체가 다른 사람이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성립되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실수는 행동에 대한 평가이다. 평가는 다른 사람이 관여되어 있지 않다면 이뤄질 수 없는 행위다. 그렇다면 평가를 하는 주체의 기준에 내가 부합이 되느냐가 가장 큰 쟁점인데,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영점을 맞추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요리사는 상대방의 기준을 최소한의 행동으로 파악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평가하는 사람이 맛이 없다면 그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요리사가 된다. 그러므로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이 일을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그 기준을 내 생각이 아닌 상대방에게 맞추겠다는 의사의 표명이라고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내가 상상한 뒤에 행동을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상상을 하면 내 머릿속에서 내 기준으로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중점으로 일이 흘러가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과정과 과정 사이사이에, 이 행동 다음에 이 행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생각이 날 것이다. 그리고 왜 이 행동 뒤에 이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있을 것이고, 아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한국인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바로 '질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게 주입식 교육과 내 방식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그러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왜 이게 이렇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물론 모두가 해주진 않는다. 그렇다면 혼자서 이것의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 우리의 실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기준과의 차이점이 된다. 이 행동과 이유에 대해서 이해해 나가는 것이 바로 상상을 통해서 영점을 맞춰가는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점이 가장 쉽지 않은 영역이란 점이다. 직접 해보면 상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놓여 거대한 장벽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우리가 상상만으로는 보지 못했던 수많은 디테일들과 당연히 더 중요할 것이라 믿었던 우선순위들이 박살 날 것이고, 늘 그랬듯이 엉망징창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처음에 다 비워놨으니까. 아무도 수학문제 개념 강의 한 번 들었다고 바로 수능장으로 가서 시험을 치르진 않는다. 그리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이 사람하고 아인슈타인하고 다 똑같은 사람이니까 개념강의 한 번 들었으니 100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다. 모든 것을 비우고 잘하고 싶다는 열망을 중심에 세운 것은 평가의 주체가 나라는 뜻이다.
언제나 잘하고 있다는 평가의 기준은 나다. 나의 열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남의 평가 기준에 나를 맞춰가는 영점은 나의 열망의 하위 항목일 뿐이다. 남의 기준에 내 기준을 맞춘다는 것이 남의 기준에 맞춰사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에 합격하기 위해서 필요한 각 과목의 평가 기준을 알아내 맞춰서 공부한다는 것이 서울대 합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평가 기준대로 공부해서 서울대가 필요로 하는 각 과목의 점수를 얻은 뒤에 서울대에 지원을 한 뒤에 서울대에 합격 통보가 나와야 서울대에 합격하는 것이다. 합격하는 것이 나의 목표인 것이지, 각 과목의 점수를 얻는 것이 진짜 목표가 아니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내 목표를 위해 남에게 맞춰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고 싶은 주체적인 목표를 위해서 내 아집을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배우고 이치를 이해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실수를 하지 않는 내가 되어 인정받겠다는 나의 열망을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주체적인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