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을 좋아하세요
미술관을 좋아하시나요?
왜 좋아하시나요?
누군가는 미술관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지적인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기도 해요
그러나 가끔 이런 것들을 만나면 되려 마음이 심란해집니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해석이 잘 안 되는 작품 앞에 서 있노라면
나만 이해를 못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내가 지금 작품을 제대로 못 즐기고 있나 아쉬워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몇 년 전 ‘소마 미술관‘의 ‘테이트 누드전’을 방문했을 때였어요.
‘세실리 브라운’의 그림 앞에서 마주친 꼬마가 생각이 납니다.
“엥? 뭐야 이게.”
시큰둥한 아이에게 부모님은
“OO아! 이런 게 예술인 거야!”
라고 나무라시더군요.
그러더니 곧 서로 쳐다보며
“근데 진짜 이건 뭘까?”
…
우린 미술이란 것이 전부 대단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작품도 있습니다.)
아마도 ’신화화‘된 예술가의 천재성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편견의 눈으로 미술을 바라보게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실제로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저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는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신화화가 ‘미술의 지위’ 획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해요.)
그러나 누벨바그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말합니다.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럼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라!”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 즐기란 말이겠죠!
흠.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왜냐면 우리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답을 찾는’ 공부만 해왔으니까요.
작품을 보고 드는 생각과 감정,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게 이게 맞는지, 혹여나 내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닌지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는 ‘거장’ 작가들 대부분은 골 때리는 반항아들입니다.
얼마나 골 때리냐면
백남준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깠습니다.
(이 이야기는 후에 백남준 글을 쓰며 다시 다루겠습니다. 언젠가…)
이번에는 19세기로 가보겠습니다.
19세기 파리 :
“여성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천박한 짓이야! 성스러운 여신의 모습을 그린다면 모를까.”
에두아르 마네 :
“응 X까~ 매춘부 그릴 거임 ㅋㅋ 왜? 너네(파리의 부르주아 남성)한텐 일상이잖아?”
마치 꼬투리만 잡히면 시비 거는 엔팁을 보는 것 같군요.
(정보 : 글쓴이의 MBTI는 엔팁이다.)
이 반항아들의 사전에는 ‘당연함’은 없는 듯합니다.
이렇게 미술이 재밌는 진짜 이유는 답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기존에 정립된 생각에 반기를 들고 파괴하는 데 의미가 있죠.
그리고 이 지점이 제가 미술에 빠져들었던 이유입니다.
"미술 공부는 정답을 찾는 공부가 아니고
질문을 찾는 공부다!"
제 삶의 궁극적 목표는 정신적 자유를 이루는 것입니다.
(경제적 자유는 이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정신적 자유란 지성으로 인도되어 스스로 사고하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백남준, 마네, 싸이 톰블리, 그리고 제게 영감을 준 수많은 미술가들은
제게 당연한 것, 통념, 타자의 생각 밖에서 사고하는 법과
삶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르쳤습니다.
미디어 과잉, 정보 과잉으로 이게 맞는 건지 내가 어디로 가는 건지 내가 가는 길이 길은 맞는 건지 근심, 걱정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 시대에
정신적 자유를 위해 문화적 투쟁을 거듭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위트 있는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요?
결론 : 앞으로 심심할 때 미술 관련 재밌는 글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