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내 세례명은 레오다.
과거 교황의 이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레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히 아는 바는 없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가 내 손, 발의 모양을 기억하기도 전에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두 번째 이름이다.
성당 공동체 안에서 자라오며 가톨릭 교리는 내 유년 시절 자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사춘기 무렵 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작고 붉은 점들은 수천억 개의 태양이 100억 년도 더 전에 만들어 낸 불빛이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인간이 최초로 문자를 발명한 시점은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치면 12월 31일 밤 11시 59분 46초.
우리는 그저 우주 먼지일 뿐이고, 먼지들을 위한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이렇게나 작은 찰나의 존재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런 생각을 가졌음에도 내가 가진 특유의 낙천성 덕에 나름 즐겁고 유쾌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저자의 아버지는 딸에게 일찍이 우린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왔다.
우린 우주 먼지일 뿐이니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라는 취지였지만, 저자에게 이 말은 실존적 위기로 다가왔다.
무기력과 우울감, 허무주의의 혼돈 속에서 인간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저자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우린 왜 사는가? 멈출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로 가득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 답을 구하기 위해 스탠퍼드 대학교 초대 학장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생애에 관심을 두게 된다.
분기학자였던 그는 평생에 걸쳐 물고기를 분류하고 이름 붙이는 일을 했다.
그에게는 대다수의 성공한 이들이 가진 특징이 있었다.
그가 평생 모아 온 물고기 표본들이 화재로 인해 증발해 버렸을 때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연구실의 물고기 표본들이 박살이 났을 때도, 그는 그 일을 교훈 삼아 더 많은 표본을 모았고 더 많은 이름표를 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는 금세 회복했고, 그릿을 잃지 않았다.
물고기를 분류하는 일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 단순 분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혼돈뿐인 세상에 규칙을 부여하는 신성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발견한 새로운 종은 수만 가지나 되었고, 과학계의 권위 있는 학자가 되었으며, 스탠퍼드 대학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삶의 궤적을 쫓던 저자가 발견한 것은 철저한 자기기만, 그리고 무시무시한 우생학의 역사였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분기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생물 간의 우열을 가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생물은 하찮은 존재이며 어떤 생물은 우월하다. 이런 그의 생각은 우생학으로 이어졌다.
어떤 사람은 열등한 존재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다.
이후 그는 장애인들, 유색인종들, 바보들, 이른바 ’비적합자‘들을 강제 불임화하는 법제화에 앞장섰고, 미국에서는 비적합자들을 수용소에 가둬두고 강제 불임 수술을 하는 일이 합법적으로 일어났다.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저자는 다시 한번 혼돈 속에 빠진다.
저자는 우생학의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갔다.
애나와 메리는 어린 시절 부적합자로 분류되어 수용소에서 만났다.
그들은 사회에 있어 무용한 존재, 없어야 하는 존재로 낙인찍혔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회로 나온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애나는 무서운 수용소에서 메리의 엄마 역할을 자처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가족이 되었다. 동네 주민들에게는 따뜻한 이웃이 되었다.
근대의 차가운 시선으로 보면 그들은 없는 것이 더 이로운 존재이지만
그들 서로에게는,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신뢰와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가 있었다.
서로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주었다.
저자는 깨닫는다.
영겁의 시간 속 찰나의 존재들인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주 먼지일 뿐인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구나.
우리 삶의 의미를 만드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구나.
성서에서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어쩌면 이 말은 삶의 의미를 찾아 혼돈을 떠도는 우리 우주 먼지들을 위한 한 마디인 것 같다.
레오가 어떤 사람인지, 기독교적 신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이제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종교적 의미를 넘어 성경은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의 말처럼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원수도, 다른 모든 찰나의 존재들과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우주의 끝없는 혼돈 속에서도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