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영화 <소울> (2021)

by 꽁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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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사주를 보러 간 적이 두어번 있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생년월일을 읊은 후, 역술가에게 대뜸 진로에 대한 질문을 했다. 대학원까지 가서 법을 전공하고 있다는 내 말을 들은 그는, 그 즉시 혀를 끌끌 찼다. 변호사는 무슨, 예체능을 해야 되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낙담했었던가? 아니. 오히려 그 말을 위안 삼았다. 일면식 없는 역술가가 보기에도 그렇다잖아. 와, 소름. 나 진짜로 문학이랑 미술을 좋아하고, 체육을 잘 한다고.


사주만 그럴까? 물고기자리는 감정이 풍부하고,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을 좋아해요. 내면의 세계가 깊고 복잡하며, 이상주의자입니다. MBTI가 어떻게 돼요? 오, 어쩐지. 요즘 뮤지션은 다 INFP예요. 이쯤이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온 세상이 등을 떠미는 것 같다. 진작 법 공부를 그만 뒀어야 했는데. 전공을 바꿨어야 했는데. 디자인을 할 걸. 사진을 할 걸. 영화를 할 걸... 재능을 일찍 발견해서 차례 차례 단계를 밟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한 분야에 죽자고 열정을 쏟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도대체 뭘 잘하는 사람일까?



2


사람들이 사주팔자에 매달리는 이유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닮아있지 않을까. 영화 <소울> 주인공 조 가드너는 '머나먼 저 세상'으로 가야하는데,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이곳에선 몽글몽글한 생김새를 가진 것들이 일련번호로 불리어진다(앞으로 '몽글이'라고 부르겠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수많은 '제리'들과 '테리'가 관리한다. 제리들은 몽글이들을 무작위로 '흥분의 집'이나 '냉정의 집'으로 보내 다채로운 성격을 형성하는 일을 한다. 몽글이의 가슴팍에는 빈 동그라미 일곱개가 그려진 그림이 붙어있다. 동그라미가 다 채워진 후에만, 그림이 '지구통행증'으로 바뀌어 지구로 뛰어들 수 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동그라미는 '불꽃'이라 불린다. 22번 몽글이는 수백년, 수천년동안 자신의 불꽃을 찾지 못했지만, 이제는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의 일상에 만족하며 지낸다. 반면, 이 세계에 불시착한 조 가드너는 지구로 돌아가야만 한다. 하필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공연 기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 가드너와 몽글이 22가 바라는 것은 같다. 22의 지구통행증을 가지고 조 가드너가 지구로 가는 것. 그리고 22가 남는 것. 그렇게 22의 불꽃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다.


22번 몽글이의 불꽃은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 얼마나 희귀하길래 아직도 찾지 못한 걸까, 아니면 머나먼 미래에서 오는 걸까. 이때까지만 해도 불꽃은 당연히 어떤 특정한 '분야'를 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22의 숨겨진 불꽃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모든 관객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쩌다 22가 불꽃을 찾으러 지구까지 와버렸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지구로 떨어진 22는, 처음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도시의 소음도 수많은 인파도 혼란스럽기만 했다. 배고픈 22는 피자를 먹었다. 아니, 맛보았다. 그동안 '모든 것의 전당'에서 수없이 먹은 음식들은 냄새도 맛도 없었다. 지구의 피자는 달랐다. 22는 피자가 너무 좋아졌다. 처음 느끼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이를테면, 손 끝으로 전해지는 차갑고 단단한 울타리, 달콤하지만 까슬한 막대사탕, 갑자기 훅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 귓가에 울려퍼지는 부드러운 노랫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22는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3


주술(?)을 통해 무작정 지구로 뛰어든 조 가드너는 고양이의 몸 속에 들어가버렸다. 간발의 차이로 조 가드너의 몸뚱아리는 22가 차지했다. 고양이 몸을 가진 조는, 조 가드너 행세를 하는 22를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지켜보게 된다. 그 중 가장 머쓱했던 순간이 있다. 22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으며 미용사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 평소에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처음으로 그 친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네가 물어본 적 없었잖아, 넌 늘 재즈 이야기만 했어.


이 대목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 불꽃은 재즈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던 조 가드너의 인생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나? 그의 인생 주요 장면들을 보여주던 씬에서는, 일평생 외롭고 쓸쓸한 장면들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아, 나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까지도 나는 내 불꽃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잠재력의 씨앗만 발견하면, 내 인생도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닌데. 삶은 일상의 순간들로 채워지는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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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꾸만 무엇이 '되려고' 애쓰며 시간을 보낸다. 마치 인생에도 목적이 있는 것 처럼. 대학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집을 사고... 이 퀘스트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조 가드너는 '그 다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22에게 삶을 선물하기로 한다. 햇살 아래 포로로 떨어지던 단풍나무 씨앗과 함께. 22의 불꽃은 그 씨앗이었을까, 자연이었을까, 아니면 삶 그 자체였을까.


나의 불꽃은 무엇일지, 단순한 호기심에 찾아본 영화는 나를 깊은 사색에 빠지게 만들었다.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야. 인생은 그보다 풍요롭단다. 혹시 너도 '하늘 보기'나 '걷기'를 좋아하진 않니? 코 끝에 스치는 낙엽의 냄새와 차갑게 시린 늦가을 바람을 즐기지 않아? 발 아래 톡톡 터지는 은행들이 주는 묘한 느낌은? 낙엽더미 사이에서 잔뜩 식빵을 굽고 있는 치즈 고양이를 쓰다듬는 건? 돈 냄새보단, 책 냄새에 코를 파묻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킨다던가 하는 것 말이야. 이런 건 사주나 별자리를 아무리 들춰봐도 없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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