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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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들 하십니까.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한가득 적은 대자보가 전국의 대학가에 붙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가 있다. 일상적인 안부 인사에도 '안녕하다'라고 대답하기 힘든 때. 어차피 의미 없는 인사일 뿐임을 다 알아도, 그냥 그렇게 대답해 주기가 싫을 때가 있다. 내 안부가 진짜 궁금한 것도 아니면서. 나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으면서.
서러운 마음에 나도 안녕하지 못한 이유를 적어봤었다. 작은 종이에다 작은 글씨로 빼곡히 채웠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대자보에 옮겨 쓰고, 어떻게 학교 건물 담벼락에 붙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몸보다 커다란 종이가 너무 무거웠다.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혹여나 들려올 소문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깜깜한 새벽 세 시쯤 온몸을 꽁꽁 싸매고 친구와 함께 붙여볼까 하다가도, 몇 시간 후 건물 관리인의 손에 힘 없이 떼어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기껏 용기를 냈는데 아무도 못 보고 사라지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그렇게 또 타이밍을 놓쳤다. 그 후로도 한참을, 그 작은 종이를 지닌 채로 다녔다. 언제 버렸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아주 한참 후라는 것 밖에.
재희(김고은)와 흥수(노상현)에게 안녕하냐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재희는 똥 씹은 표정으로 '안녕 못한데요.' 할 것 같고, 흥수는 '...하.. 안녕이 뭐냐~' 하면서 담배 연기를 훅 내뱉을 것만 같다. 둘 다 안녕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나 많고도 깊어서, 영화 러닝타임을 꽉 채우고도 남는다. 가끔 너무 무겁고 진지해질 때면,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가볍게 넘어간다. 그래. 잠깐씩이라도 웃어야지. 안 그러면 인생이 너무 고달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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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와 흥수는 다르다. 재희는 매일 빨간 컨버스를 신고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한다. 흥수는 오늘도 빨간색 치마를 고르는 재희에게, 빨간색은 너무 튀지 않냐고, 한 달에 두세 번쯤 입는 옷을 왜 사냐고 쇼핑에 훈수를 둔다. 재희 눈에는 흥수가 새로 산 옷과 원래 입고 온 옷이 당최 분간이 안 된다. 비슷한 스타일, 튀지 않는 색깔. 대신, 흥수는 특별히 꾸미는 날이 따로 있다. 게이 클럽에 놀러 갈 때, 그리고 데이트를 할 때다. 그날은 머리를 아주 예쁘게 손질해서 뒤로 넘긴다. 재희의 정체성이 빨간 컨버스라면, 흥수는 말해 뭐 해, 포마드 헤어다.
영화 속에서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20대 초반에는 재희가 흥수를, 흥수가 재희를 지켜준다. 물론 각자의 필요에 의해서지만, 꽤 요긴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며 각자의 타임라인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산부인과에서 자궁 모형을 뽑아 들고 온 재희는, 이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멈추었다. 자격증을 따고, 취업 준비를 하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흰색 플랫슈즈를 신는다. 흥수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감추려고 애쓴다. 둘 다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자기를 숨기는 방법을 택했으나, 결과는 슬프고 비참했다.
30대. 재희는 다시 빨간 컨버스를 신은 채 웨딩로드를 걷고, 흥수는 포마드 헤어를 하고 사람들 앞에서 걸그룹 'Miss A'의 'Bad Girl Good Girl'을 춤추며 노래한다. 흥수는 이제 집에서도 여전히 포마드 헤어를 유지하며 글을 쓰고, 재희는 그런 흥수에게 형사와의 소개팅을 제안한다. 재희와 흥수는 어느새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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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자신을 지키는 것. 내가 나 자신일 때 오는 해방감은 얼마나 크며, 이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든든한가. 재희와 흥수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서로의 20대를 잘 보듬어 주었다. 끔찍하게 혼자인 것만 같았던 나의 시간들에도, 곁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나를 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걔네들 앞에서 주접은 못 떨어도, 나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 감추는 것보단 드러내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잠깐씩은, 그렇게 숨통이 트였다.
의외로 논란이 된 것은 이 영화의 예고편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소설은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이고, 한국 퀴어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정도로 그 팬층이 두터웠다. 너무나 유명한 김고은 배우가 재희 역을 맡아, 영화화 소식에 다들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예고편을 눌러봤더니, 아니, 게이 흥수는 온 데 간데없고, 마치 재희와 흥수의 투닥투닥하는 연애사를 그린 것만 같았다. 퀴어 요소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퀴어베이팅'은 들어봤어도, 퀴어가 있는 데 쏙 빼먹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지금은 드라마 <정년이>에서 또 퀴어를 빼버렸지만 말이다. 책《퀴어돌로지》 공저자인 연혜원 작가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헤테로베이팅'이라는 용어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영화에서는 내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자. 사랑하자.'라고 말하면서, 예고편에서는 왜 영화를 숨기는가? 아, 혹시 '숨김과 드러냄'이라는 컨셉을, 예고편과 본편의 구조 속에서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일까? ......에이, 설마. 백 번 양보해서 설사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쳐도, 영화 관람객들에게 그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으니 이는 명백히 실패한 방법이었음을, 크게 소리쳐야겠다.
다시 숨기라고? 에이, 이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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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녕들 하신가요? 세상은 십 년 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어 보이고, 갈등과 혐오만 더 짙어간다. 복잡하고 외로운 세상이다. 당신은 오늘, 친구에게, 가족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건넨 적이 있는가. 진짜로 '안녕'한 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이해해 줄 단 한 사람, 나를 사랑해 줄 단 한 사람, 나의 안녕을 진심으로 궁금해할 사람. 그 한 사람이야말로 내가 가진 모든 빛깔을 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모두가 안녕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