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장 연우와의 하루

by 이병일

쉼표를 선물받다

앞만 보고 내달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게 나에게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요즘에는 자기 계발이다 취업준비다 어학연수다 교환학생이다 또는 여행을 위해서 휴학들을 많이 하더군요. 2000년대 초만해도 체감 상 절반 정도의 학생들은 8학기만에 바로 졸업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4년간 대학생활올 보냈습니다. 졸업은 2월이지만, 전공이 조선해양공학이다보니, 1월부터 울산 소재 조선소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대기업에서 약 4년여의 생활을 마친 어느 금요일, 그리고 그 다음주 월요일부터 시작한 컨설팅 회사에서 5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파트너님과 컨설팅 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5년 정도를 보냈던 시점이니, 약 13~14년간 말 그대로 숨쉴 틈 없는 여정이었네요. 도중에 갑상선 암이 왔는데, 갑상선을 반절 떼어내고 며칠 후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바로 복귀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무엇에 그렇게 쫓기면서 지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다 둘째 연서가 우리에게 왔고, 아내의 복직과 맞물려, 잠시 건강도 체크하고 첫째 연우를 돌보기 위해 저에게는 생경한 ‘3개월의 휴직’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면서도 절경을 감상하지 못해온 저에게 건네어진 가장 아름다운 쉼표였습니다. 그 3개월은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로 채워졌습니다. 매일 아침 연우에 작은 숨결과 함께 눈을 뜨고, 낮에는 고요 속에서 나를 찾고, 오후에는 연우와 대공원의 싱그러운 공기를 마셨습니다. 모든 순간이 오롯이 나와 가족에게 집중하는 인생의 가장 찬란한 장면들을 기억의 박물관에 채워 넣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의 그림자와 빵의 온기

여느 아침과 다를 바 없이, 네 살 연우의 고른 숨결이 잠을 깨웠습니다. 창밖은 이제 막 동이 터 오며 푸른 빛을 머금고 있었지만, 거실 안쪽은 밤새 고여있던 가족의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부스스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예전의 조급함이 묻어있지 않았습니다.

작은 식탁 위에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과 연우가 좋아하는 동물 모양 소시지, 그리고 알록달록한 딸기와 블루베리를 올려두었습니다. 서툰 솜씨로 자른 과일 조각들이 접시 위에서 제각각의 빛깔을 뽐낼 때, 연우는 작은 손으로 포크를 쥐고 앙증맞게 음식을 입에 넣었습니다. 오물거리는 입술과 무언가 기대에 찬 반짝이는 눈망울.

“아빠, 오늘 동물원 갈 거야?”

아이의 시간 관념은 늘 혼란스러우면서도 집요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오르한 파묵이 딸 뤼야와 바다에 가기로 약속했을 때, 뤼야가 5분마다 찾아와 “지금 가는 거야?”라고 묻던 그 은밀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가 연우에게서도 들려옵니다.

“응, 연우가 밥 다 먹으면 갈 수 있지”

아이는 더욱 열정적으로 포크질을 시작합니다. 그 평범하고도 완벽한 풍경은 어떤 명화보다 아름다웠고, 나는 그 작은 손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행복의 실체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고요와 활자의 시간

연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나면, 고요한 시간이 나를 찾아옵니다. 쨍한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오는 아차산 인근 요가원에서 지난 10여 년간 굳어있던 어깨와 허리의 긴장을 풀어냈습니다. 요가라는게 쉬운 운동이 아니더군요. 몸은 삐걱거리고 땀은 비오듯 내렸습니다. 뭔가 유연함이 필요한 동작이 더 땀이 나고 잘 안되네요. 그래도 살람바 시르사아사나(Salamba Sirsasana), 지지되는 머리 자세라는 뜻인데, 머리, 팔, 어깨로 균형잡고 다리를 곧게 펴는 물구나무 자세가 거의 유일하게 선생님께 칭찬받은 자세였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래도 근육이 이완될 때마다 삶을 옥죄던 조급함도 함께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운동을 마친 후엔 어린이대공원을 가로질러 집까지 30여분을 걸어갔습니다. 샤워를 하고나서 동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따뜻한 아메리카노의 향기에 취했습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그곳에서 가방 속 책을 꺼내거나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썼습니다. 활자들 사이에 머무는 시간은 자신과의 내밀한 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쉼 없이 달려오느라 돌보지 못했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었습니다.


대공원으로의 여정, 부서지는 햇살

오후 3시, 연우를 데리러 갑니다. 어린이집 문이 열리고 “아빠!” 하고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이의 온기는 하루의 피로를 단숨에 씻어냅니다.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어린이대공원으로 향합니다.

평일 오후의 대공원은 정갈하고 한적했습니다.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햇살에 부서져 영롱한 무지개를 만들면, 연우는 그 신비로운 빛을 향해 작은 손을 뻗으며 환호했습니다.

“아빠, 무지개!”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늘 무지개처럼 반짝였습니다. 푸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진 길을 따라 걷습니다. 새소리가 나직이 들려오고, 촉촉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아빠, 저기 꽃 봐!”

연우는 길가에 핀 작은 들꽃들을 가리키며 재잘거립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꽃을 들여다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동물 친구들과의 만남

걷다보면 어느새 동물원입니다. 넓직한 공간에 낮은 철조망이 쳐져있는 사슴우리는 항상 들르는 코스입니다. 연우가 그 중 덩치가 작은 사슴 한 마리를 한참 쳐다봅니다.

“아빠, 저 사슴 엉덩이가 귀여워!”

아이의 엉뚱한 말에 그만 웃음이 터집니다. 사슴에게 조심스레 먹이를 건네고, 사슴의 거친 혀가 아이의 손바닥을 핥을 때 들려오는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동물원 전체를 따뜻하게 채웠습니다,

늘 잠만 자는 사자를 보며,

“사자는 왜 맨날 자?”

하고 묻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원숭이들의 재롱에 배꼽을 잡습니다. 작은 동물들이 모여 있는 미니 동물원에서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미어캣을 구경합니다. 녀석들이 빼꼼히 머리를 내밀 때마다 연우는 소리 없는 탄성을 지릅니다. 반짝이는 유리창 너머로 작은 꼬리를 흔드는 미어캣들이 연우의 눈에도 신기한 모양입니다.


정글짐의 자유와 아쉬운 노을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늘 대공원의 커다란 놀이터였습니다. 연우는 동네 놀이터보다 훨씬 크고 다양한 방식의 계단과 철봉과 미끄럼들과 데크로 이어진 정글짐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빠, 나 잡아봐라!”

가냘픈 몸으로도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 않고 척척 올라가는 아이의 균형 감각은 나를 놀라게 합니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종이컵에 모래를 담기도 합니다. 흙먼지를 털어 내려다가도 다시 모래 위에 주저앉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네 살 아이지요. 옆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지켜보며 때로는 같이 모래성을 만듭니다. 흔들리는 그네에 몸을 맡겨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연우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 같았습니다.

“더 높이! 더 높이!”

아이의 외침에 더욱 힘껏 그네를 밀어봅니다. 얼굴 가득 웃음꽃이 피어나는 연우를 보며 행복을 느낍니다.

그네를 더 높이 밀어달라고 외치던 아이의 웃음꽃이 만개할 무렵, 어느덧 저녁 햇살이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아빠, 조금만 더 놀자~”

뤼야처럼 연우도 “더 놀자”며 떼를 쓰지만, 저무는 해를 보면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저녁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놀이터를 뒤로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하루의 마무리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엄마의 퇴근 시간에 맞춰 대공원 정문 입구에서 만납니다. 주홍빛 노을 지는 하늘 아래,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셋이서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며 웃음꽃이 핍니다.

“연우 오늘 캥거루, 아니 사슴 엉덩이 봤어!”

“응? 엉덩이를 왜 봐?”

엄마의 질문에 깔깔거리는 연우. 그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웁니다. 따뜻한 밥상 위에 오가는 소박한 대화들. 그렇게 우리의 하루는 마무리됩니다. 3개월의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것은 단순히 ‘멈춤’이 아니었습니다. 멈춰 서서 사랑하는 이의 눈을 바라보고, 그 평범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발견하는 행복이 얼마나 가슴뛰게 하는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쉼표들은 내가 앞으로 어떤 풍파를 겪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단단한 힘이 되어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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