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현상) 삶의 지도가 무너진 순간

1장 하늘이 무너지다

by 이병일

기다림과 첫 만남

어느 가을날 새벽녘. 아이는 10개월 간 큰 탈없이 아내의 뱃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이제 곧 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진통에 안타까우면서도 둘째를 맞이할 설레임을 함께 느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서너시간 후 아이를 보게 될 것 같았습니다.


긴박한 상황, 그리고 갑작스러운 결정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한 걸 안건, 병실 모니터에 아이의 심박이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낮게 나타났습니다. 신호 오류인가 싶었지만 혹시 몰라 간호사분께 문의했습니다. 간호사분이 오더니 당황하면서 담당의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담당의사가 오고 나서 상황이 심각함을 실감했습니다.

“긴박합니다. 지금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야 합니다.” 의사의 한마디는 평온하던 제 세계를 단숨에 무너뜨렸습니다. 119에 연락함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제왕절개 결정과 함께 아내는 수술실 안으로 사라졌고, 굳게 닫힌 수술실 문 앞에서 저는 버려진 사람처럼 서 있었습니다. 불안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시야를 어지럽혔습니다.

저는 복도의 좁은 보도블록 문양을 따라 발을 동동 구르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고, 기도는 간절함을 넘어 처절한 비명이 되어 입안을 맴돌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길고 잔인한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시계 바늘의 째깍거림은 제 심장 소리보다 더 크게 울리며 저를 조여왔습니다.


첫 만남

드디어 아이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첫째 때와 같이 평범한 아빠들이 누리는 환희와 축복의 눈물의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119 대원들이 아이를 데리고 급히 복도를 뛰어갑니다. 수술실 밖으로 나온 것은 기쁨이 아닌 무거운 침묵이었습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뒷모습과 어둡게 가라앉은 의료진의 눈빛을 보는 순간, 저는 어딘가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했음을 직감했습니다.

119 대원들 틈 사이로 아이를 얼핏 보았을 때, 제 심장은 쿵 하고 바닥 끝까지 추락했습니다. ‘입술이 새파래진다’는 말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덧칠해진 듯, 아이의 몸이 온통 푸르스름 했습니다. 탯줄이 끼어 숨을 쉬지 못했던 그 작고 푸른 생명체가 바로 제 딸, 연서였습니다. 아이는 곧바로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고, 저는 영혼이 빠져나간 채 운전대를 잡고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습니다. 아내를 회복실에 홀로 남겨둔채…


얼어붙은 시간

응급실 앞에서의 기다림은 이전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했습니다. 붉은색 사이렌 조명이 회색 벽면을 타고 번쩍일 때마다 제 희망도 명멸했습니다. 응급실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담당 의사분께서 잠깐 동의를 구하러 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로 다가왔습니다. “살 확률이 절반 이하입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런 기분일까요.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다 못해 산산조각이 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차가운 병원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신의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제발, 우리 연서가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입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작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연서가, 살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한마디에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터져 나오는 안도감과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천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쏟아졌습니다. 살아줘서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 말만을 아이의 이름을 부르듯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살았다는 기적 같은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현실은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다시 제 가슴을 갈랐습니다. 산소 공급이 중단되었던 그 짧고도 길었던 시간 때문에, 연서의 뇌가 정상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기적을 붙잡았다고 믿는 순간, 또 다른 절망의 심연이 발밑을 휩쓸었습니다.

저는 망연자실한 채 병원 복도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슬픔과 절망, 좌절, 그리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연약한 아이에 대한 한없는 연민이 파도처럼 저를 덮쳤습니다. “왜 하필 이 작고 무고한 아이에게 이런 시련이 닥쳐야 하는가”라는 원망 섞인 질문이 가슴 속에서 소리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병원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한 채 차갑게 식어갔습니다.


폭풍 속에서

무엇보다 저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이 잔인한 소식을 아내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을 아내가, 아이의 생사가 오가는 이 현실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웠습니다.

또한, 집에서 아빠와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첫째 딸 연우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부부의 이 거대한 슬픔이 연우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저를 집어삼키는 듯했고, 저는 완전히 그 감정의 무게에 압도되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 가족의 미래는 이제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다짐

회복실에 누워있는 아내를 잠깐 보러 들렀습니다. 저는 살아주었음을, 그러나 뇌가 심하게 손상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아내는 연신 눈물만 흘렸습니다. 손을 잡아주긴 했지만, 제 얼굴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무거운 공기를 뚫고 저는 다시 연서를 보러 갔습니다. 작은 병원 침대 안의 연서는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습니다. 각종 의료 기기들에 둘러싸여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잠들어 있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을 혼자 짊어진 가련한 작은 천사 같았습니다.

저는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그 작고 여린 손을 잡았습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의 따뜻한 온기는 저를 다시 일깨웠습니다. 저는 다짐했습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아빠는 세상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험난한 고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연서와 함께 이겨내겠노라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조각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가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연서는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우리에게 찾아온 소중한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까지만 해도 이 깊은 고통의 터널에 끝이 있을지, 끝이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될지, 끝이 없다면 어떻게 감당해나가야 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앞일을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는게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그렇게 하늘이 무너진 채로 덩그러니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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