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by 이병일

장면 하나: 한 줄기 위로가 흐르다

성시경 씨의 ‘두 사람’이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맑고 청량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그의 목소리는 제 마음의 풍경과 겹쳐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그날도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습관처럼 유튜브에서 음악을 재생했고,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음악들을 들으며 좋아하는 곡이 나오면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했지요. 그러다가, 간주가 나오자마자 저절로 “아, ‘두 사람’이네.”하고 혼잣말을 내뱉었습니다. 그 순간, 화면에 뜬 짧은 댓글 하나가 제 시야를 어지럽혔습니다.

“느리게 크는 딸을 키우는 엄마인데, 예전엔 사랑 노래라 생각했던 이 노래가 저와 제 딸의 이야기가 되었네요… 눈물이 많이 나요. 위로가 되는 노래를 불러주셔서 감사해요.”

누군가 제 마음속 수도꼭지를 끝까지 틀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남편이자, 세 딸아이의 아빠입니다. 집안은 언제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중 둘째 아이는 조금 느리게 자라고 있습니다. 벌써 9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그날의 장면들이 드문드문 기억납니다. 새벽녘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뱃속에서 머리가 자궁입구에 끼이면서 탯줄에서 산소 공급이 몇 분간 안 된 걸로 보입니다. 급하게 제왕절개로 아이를 꺼냈지만, 119 대원들이 아이를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로 데려가는데 얼핏 보니 몸 전체가 푸르스름했습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혼미했습니다.

아이는 기적처럼 살아남아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지금도 거실에 퀸사이즈 리클라이닝 침대를 놓고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인지는 거의 없고, 유동식을 위루관으로 먹입니다. 석션(suction)을 하고, 가래가 쌓이지 않도록 등을 두드려주고 자세를 바꿔줍니다. 다양한 방식의 치료와 재활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지친 하루가 가고, 달빛 아래 두 사람 하나의 그림자, 눈 감으면 잡힐 듯 아련한 행복이 아직 저기 있는데…’

해질녘 둘째를 목마 태우고, 둘이 노을을 보며 서 있는 모습이 노래와 댓글의 구절과 겹쳐졌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 깊이 응어리졌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저는 한동안 멈춰 서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노르웨이의 신경과학자 아멜리아 리들랜더(Amelia Ritland)가 말했듯, 음악은 뇌의 감정 영역을 직접 건드려 잊고 있던 기억을 소환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걸 이때만큼 절절히 느껴본 적이 있을까요. 그날의 노래는 제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한 딸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고 감사함이라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건드린 것이었습니다.

삶은 때로 우리가 정성껏 그려온 지도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곤 합니다. 잔잔하게 흐르던 강물 같던 일상이 갑작스러운 파도에 휩쓸려 통째로 흔들릴 때, 우리는 젖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막막함의 심연을 마주합니다.

이 글은 삶의 길 위에서 제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파도에 관한 기록이자, 그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저를 지탱해준 소중한 지침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지식의 나침반이 되었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의 손길이 되어 준 이론과 연구들을 제 삶에 적용하며 얻은 실천의 기록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20년이 넘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전략 컨설팅이라는 업에 몸담아왔기에 논리적 글쓰기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저의 문장들이 어쩌면 갓 구워낸 빵처럼 따스하기보다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생의 가장 내밀한 풍경과 제가 힘을 얻어온 과정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전달하려는 마음을 문장들 속에 담았습니다. 부디 이 마음이 인생의 예기치 못한 겨울을 나고 계신 분들에게 작은 위안과 희망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장면 둘: 마음을 들키는 순간

운이 좋게도 컨설팅을 하며 인간적으로 친해진 고객사 분들이 많습니다. 밤낮으로 부딪히며 치열하게 논쟁하고, 새벽에 퇴근하다가 술잔을 기울이며 사람으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와중에 전우애가 생기곤 합니다. 이렇게 서로 힘을 보태는 인생 동료가 됩니다.

하루는 한 금융회사 고객사 팀장님 일행과 을지로가 내려다보이는 루프탑 와인바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늦은 봄의 저녁 바람은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도심의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재즈 선율이 흐르고 와인잔 속 붉은 빛이 깊어지는 가운데, 대화는 어느덧 업무 이야기에서 육아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습니다.

아이의 투정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아이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이의 감정 상태가 ‘빨간색’인지 ‘녹색’인지 먼저 보고 훈육을 결정해야 한다는 비유였지요. 또한 이를 ‘신체 예산’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팀원분께서 갑자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엄마로서 상황에 따른 훈육법만 고민했지, 아이의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고 하시면서요.

저는 한 가지 화두를 더 던졌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라고. “부모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 즉 마음에 적색등이 들어온 상태에서는 아이를 훈육하면 안되는 것 같아요. 그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전가되고 스스로도 자책하게 되니까요.” 그 말에 팀원분은 더욱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부모 마음은 다 같은가 봅니다. 저 또한 책에서 이 내용을 접했을 때 가슴 한편이 아렸거든요. 저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이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은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라이자 모스코비츠(Liza Moskowitz) 같은 심리학자들은 부모의 정서적 안정감이 아이에게 미치는 긍정적 영향을 강조하며, 부모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된다고 역설합니다. 제가 배우고 실천하는 이런 내용들을, 특히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신체 예산이 바닥나고, 만성적으로 스트레스 상태에 있는 부모님들과 나누고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 팀원분처럼 도움받는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제 마음을 들킨 걸까요. 팀원분께서 제게 육아에 대한 책을 쓰면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주제는 다를 테지만, 책 내용은 고민 중이라고 말씀드렸고, 그분께서는 꼭 책을 자비로 사서 보시겠다고 웃으며 얘기하셨습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썼지요. 한 가정이 인생을 흔드는 큰 사고와 마주했을 때, 그 상처를 딛고 회복하는 모습은, 그 아픔의 깊이와 성격, 그리고 아픔을 견뎌내는 가정의 단단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절망인 아픔일지라도, 어떤 이에게는 힘겹지만 이겨낼 수 있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 차이는 상황을 대하는 내면의 힘에 있습니다.

긍정 심리학자 릭 핸슨(Rick Hanson) 박사는 그의 저서 『행복 뇌 접속(Hardwiring Happiness)』에서 우리 뇌가 부정적인 경험에 더 쉽게 각인되는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사건 후에 아픔 속에 갇히지 않으려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사건 이전에 얼마나 단단한 내면의 힘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할테지만, 사건 이후에 어떻게 회복해나가는가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특히 개인을 넘어 가정 전체의 내면의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전략 컨설팅의 문제 해결의 요체는 ‘Divide and conquer’에 있습니다. ‘상처안고 살아가기’라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긍정심리학, 회복탄력성, 행복론,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등에 대한 책과 연구들을 공부했습니다.

바더-마인호프 현상(Baader-Meinhof Phenomenon)은 어떤 새로운 단어나 정보를 알게 된 후, 그 정보가 갑자기 주변에서 더 자주 눈에 띄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지 현상을 말합니다. 가급적 항상 안테나를 켜두고 모든 채널에서 자료를 모았습니다. 심리학 전문서적에 국한되지 않고, 진화심리학, 물리학, 행동경제학 등의 전문서적, 소설, 영화나 만화, 유튜브 등의 컨텐츠, 실제 카운슬링 경험담과 적용 사례, 다양한 기사 및 인용 자료들을 제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제 생각에 닿아있는 아이디어가 엿보일때마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모아두었고, 틈나는 대로 문장으로 옮겨두었습니다. 제 삶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습니다. 최선의 방법론일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차츰 저희 가정이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내면의 힘을 길러가는 여정을 밟았습니다. 먼저, 가정의 신체예산을 살피고,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정의해보려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정 내에서 관계를 어떻게 단단하게 가꾸는가, 부모로서 개인은 어떻게 스스로 단단하게 신체예산을 적립해가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려 했습니다. 9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책이라는 하나의 결과물로 저의 생각이 정리가 되었네요.

가정의 단단함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부의 신뢰 관계입니다. 예기치 않은 사고가 찾아왔을 때, 부부는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하는 하나의 팀이 됩니다. 존 고트먼(John Gottman) 박사는 오랜 기간 수천 쌍의 부부를 연구하며, 결혼 생활의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는 요인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부부가 스트레스와 역경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서적 연결(emotional connection)’과 ‘서로에 대한 긍정적 관점(positive sentiment override)’이었습니다. 즉, 평소에 서로에게 쌓아온 깊은 신뢰와 유대감이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회복 탄력성으로 발휘된다는 것이겠죠.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을 종종 시청합니다. 이미 서로에 대한 신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진 부부들의 모습들이 그려지곤 합니다. 이혼 직전의 부부들이 마지막으로 관계 회복을 시도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겉으로는 사소해 보이는 갈등이 실은 깊은 불신과 상처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한 남편은 아내의 소비 습관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비난했고, 아내는 경제적 통제에 대한 불신과 고립감에 시달리고 있었죠. 이들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팀이 아니라 서로를 헐뜯고 상처 주는 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부간의 신뢰 관계가 이미 깨진 상황에서는, 어떤 사고가 닥쳐오더라도 이를 함께 감당해낼 팀으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는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다행히도 아내와 관계가 좋은 상황이었고, 둘째가 아프게 태어나는 사건을 겪은 이후 팀으로서 서로 더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의 글은 팀으로서 기능하기 어려운 상황에는 해당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향한 배우자 간 기본적인 믿음이 있음을 전제로 저희 가정이 회복하는 과정과 실천을 글로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이 책의 구성에 대해

저는 이 책을 통해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이나 또는 그 반대로 이론적인 내용만을 설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 삶에 새겨진 깊은 흉터를 지우려 애쓰기보다 그 흉터의 모양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그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생의 무늬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제 제가 정성껏 마련한 이 기록의 화랑들을 여러분과 함께 걷고자 합니다.

· 1부(현상) 삶의 지도가 무너진 순간: 9년 전 그 푸르스름했던 새벽, 우리 가족의 세계가 송두리째 흔들렸던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중증 장애를 가진 둘째와 함께하는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역설적으로 우리가 발견한 ‘가정의 행복’과 ‘살아내겠다는 다짐’의 순간들을 담았습니다.

· 2부(이론) 신체 예산과 회복의 메커니즘: 상처를 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의지만이 아닌, How to를 위한 가이드가 필요합니다. 저는 여기서 ‘신체 예산’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마음의 에너지를 관리하는 법을 논하고, 행복을 목표가 아닌 과정으로, 크기가 아닌 빈도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들을 제안할 것입니다.

· 3부(실천) 관계와 나를 재건하는 기술 (1) 관계: 고통은 고립을 부르지만, 치유는 연결에서 시작됩니다. 아이와의 눈맞춤, 배우자와의 깊은 대화, 그리고 감정의 온도를 읽는 ‘무드 미터’를 통해 관계가 어떻게 상처를 보듬는 단단한 성벽이 되는지 기록했습니다.

· 4부(실천) 관계와 나를 재건하는 기술 (2) 나를 살피다: 타인을 돌보기 전, 먼저 무너진 나 자신을 재건하는 시간입니다. 신체 예산을 회복하기 위한 체력 관리와 휴식, 그리고 제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준 독서와 지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 5부 현재, 그리고…: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막내의 탄생과 가족 여행의 풍경을 전합니다.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Rethink), 책 읽는 아이들과 함께 평범한 토요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적임을 고백합니다.

컨설턴트로서 내용을 구조화하고 정리하는데 훈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프로젝트라는 목적을 둔 대상을 상정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것에 비해, 누구일지 모르는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건 새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작업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신변 잡기적인 내용을, 때로는 좀 당연하다 싶은 내용을, 때로는 근거가 약한 저의 생각을 글로 옮기다보니 과연 ‘책’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누가 사서 보기는 할까, 사놓고 몇장 읽다 말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그 두려움의 실체였던 것 같습니다. 제 글을 다시 읽고 고쳐쓰는 과정에서 드는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더군요. 흔한 표현이지만, 마치 일기를 공개하는 느낌이랄까요. 책을 한번이라도 출간해보신 분들과 전문 작가분들에게 다시금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제 글이 모든 이에게 정답이 되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 예기치 못한 비를 만나 젖어 있는 누군가에게, 이 투박한 기록이 ‘함께 젖어 본 이가 건네는 작은 우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범한 성자의 가르침이 아닌, 매일 새벽 아이의 석션 소리에 잠을 깨면서도 내일의 희망을 엑셀 시트처럼 정교하게 설계해 보려 애쓰는 한 아버지의 진심이 당신의 마음에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