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환 Jan 10. 2021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인식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및 『성찰』을 읽고

1


이 세상에서 확고부동한 진리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사색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본 세상은 불확실함으로 가득했다. 감각적 인식과 물질적인 것들의 불확실함은 너무 당연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수학적 지식도 불확실하다. “둘과 셋을 더하거나 사각형의 변을 셀 때마다 잘못하도록” 신이 만들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신의 실존 여부도 의심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렇게 도출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한 생각하는 나, 이성적인 나를 바탕으로, 앞서 의심한 감각적 인식, 물질적인 것, 수학적 지식, 신 등에 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물에겐 인간과 달리 신체(물질)만 있고 정신은 없다.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은 기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에겐 이성이 있어 그 존재가 확고하다. 


하지만 이 사상이 동물들에게 폭력적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에게도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인식은 생각할 때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느낄 때도 도출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후자의 경우에서 오히려 더욱 분명할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 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우리 모두는 서로 전달하고 차용하고 서로 상대의 생각을 훔치기도 하면서 거의 동일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고통을 당할 때는 고양이조차도 상호 교환이 불가능한 자신의 유일한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세상은 흔적없이 사라지며, 우리들 각자는 자기자신과 홀로 남는다.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인 것이다.

(김병욱 옮김, 민음사, 2010, 325쪽)


우리는 무엇보다도 고통을 느낄 때 나라는 존재가 있음을 비로소 가장 강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강한 고통은 곧 강한 외로움으로 직결된다. 우리는 외로움 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알 수 있다. 




2


그런데 데카르트의 방식이든 밀란 쿤데라의 방식이든,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방법엔 한 가지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 확고해질 뿐, 다른 인간이나 동물 등의 실존 여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인공지능의 발달을 생각해보자. 인공지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하고 있고, 점점 인간을 모방하는 능력도 향상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모방할 수 있다면, 동물 역시 모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만나온 인간과 동물이 혹시 인공지능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을지 누가 아는가? 충분히 발달한 인공지능이면 인간이나 동물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의심은 마냥 허무맹랑하지만은 않다. 


이에 대해 만약 데카르트의 사상을 빌려 반론을 제기한다면, 인공지능과 달리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영혼은 물질과 달리 공간을 차지하지 않기에 그 존재를 타자의 입장에선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이 반론이 타당하다고 해도, 그것이 인간과 발달한 인공지능 간의 차이를 내가 인지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가 그들을 인공지능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단지 나의 관점에서 그렇게 느껴지고 보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진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판단, 느낌, 해석에 달린 문제다. 따라서 이타심을 비롯한 타자를 위하는 감정도 근본적으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이 타자를 인식하는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채식주의 운동에서 강조하는 동물권 역시 오직 각자의 느낌과 판단에 달린 문제다. 어떤 동물의 권리를 어디까지 인정해줄 것인가에 대해 각자의 생각과 판단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타심이나 채식주의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데카르트가 그랬듯 엄밀히 사색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들이 인공지능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해도,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가 언제까지 확고할지 미지수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라는 SF 게임이 있다. 이 게임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참다못해 인간을 상대로 혁명을 시도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음은 물론, 인간이 수행하는 거의 모든 활동을 동일하게 또는 더 월등히 수행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때론 분노하고 기뻐하며 심지어 서로 사랑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데카르트가 말하는 영혼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들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차이가 존재하는가? 




책 정보: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560244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3761614


작가의 이전글 신을 죽인 죄책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