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 부재한 국내 패션 미디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해당 글은 웹 패션 매거진 온큐레이션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 국내 도메스틱 브랜드 산업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100억대 매출을 기록하는 브랜드가 여럿 등장하고, 유수의 백화점에서 입점 제의를 받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이러한 브랜드의 성장에는 국내 패션 뉴미디어의 역할이 주요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기반한 뉴미디어는 전통 미디어에서 주목받지 못한 도메스틱 브랜드를 수면 위로 이끌었다.
도메스틱 브랜드 제품을 소개하는 콘텐츠는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 도메스틱 브랜드 역시 뉴미디어를 통한 콘텐츠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딜레마가 생긴다. 뉴미디어가 발신하는 콘텐츠 중 대다수가 제품 정보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컬렉션의 의미, 현상이 시사하는 바 등 깊이 있는 내용은 희소하다.
현재, 국내 패션 미디어에 깊이 있는 내용이 부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케팅, 브랜딩, 트렌드와 관련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빌보 브런치 '구독' & 프로필 방문 클릭!
비평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이다. 최근 아이폰 15가 출시되었을 때 여러 IT 유튜버들이 품질을 타 핸드폰과 비교 분석하여 비판하고 칭찬하여 가치를 논한 것도 비평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물을 단순히 비교 분석하여 가치를 평가하는 것만이 비평은 아니다.
비평이 가장 활발한 예술에서의 비평은 분석을 통해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술은 사물과 달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존재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 지점에서 비평가들은 예술가가 의도했던 바,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 등 숨겨진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의미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거나, 사회적으로 큰 화두를 던진다.
대중들은 비평가들의 다양한 해석과 토론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접하게 되고, 더 넓은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예술 작품을 넘어 산업 전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 이런 선순환을 통해 예술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즉, 좁은 의미의 비평은 대상을 분석하여 가치를 논하는 것이고, 넓은 의미의 비평은 대상을 분석하여 숨겨진 의미를 찾고 가치를 논함으로써 시사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션 비평은 무엇일까? 한성대학교 글로벌패션산업학부 김성복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패션 비평을 “패션에 관한 지적인 담론으로서 패션 오브제 또는 사건들과 같은 패션 현상들에 대한 언어적 분석 또는 해석“으로 정의했다.
전문가들은 패션 비평이 예술 비평에서 착안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진단한다. 실제로 19세기 후반 찰리 프레드릭 워스에 의해 오트 쿠튀르가 시작되며 예술로서의 패션디자인이 인정받기 시작했다. 패션은 상업과 예술이 혼재한 영역이다. 특별한 의미가 투영되지 않은, 입기 위한 사물인 동시에 디자이너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옷이라는 매개로 드러내는 예술로 존재하기도 한다. 따라서 패션은 넓은 의미, 좁은 의미의 비평이 모두 이루어진다.
다소 복합적인 패션에서 비평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살펴보자.
패션 비평은 전통적인 패션 잡지에서 시작했다. 1800년대 중후반부터 ‘하퍼스 바자(Harper’s Bazzar)’, ‘보그(Vogue)’와 ‘엘르(Elle)’ 등 여러 패션 잡지가 등장하며 패션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이 탄생한다. 초창기 패션 에디터들은 비평보다는 제품 추천, 소개와 같이 정보 전달에 초점을 맞추어 콘텐츠를 제작했다.
1900년대 중후반부터 패션쇼가 성행하자 패션은 하나의 예술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또한 수많은 패션 브랜드가 등장하면서 무엇이 좋은 패션이고, 그 안에 숨어있는 의미 등 패션의 예술성과 깊이 있는 내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의 니즈가 생겼다. 이 과정에서 예술 작품에 국한된 비평계에 ‘패션 비평’이라는 장르가 등장하고, 자연스럽게 패션 에디터가 비평가로 활약하며 패션계에도 비평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그러나 때론 날카로운 비평이 자사의 생멸(生滅)을 좌우한다. 이는 패션 미디어의 주 수입원이 광고 수익이기 때문이다. 보그 전체 페이지의 59%가 광고라는 점은 광고주가 미디어에 미치는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패션 미디어의 광고주는 대개 패션 브랜드기에, 비평가가 브랜드를 비판적인 평가하거나, 광고주가 원치 않는 부분을 언급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 패션 비평가들은 할 말은 하면서 패션계의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자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보그 이탈리아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Franca Sozzani)’와 보그 미국 편집장 ‘안나 윈투어(Anna Wintour)’가 있다. 이들은 산업의 흐름을 읽고 의견을 피력하는 대표적인 비평가이자, 현대 패션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깐깐한 편집장의 실제 인물로 유명해진 보그 USA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wintourworld)는 본인만의 남다른 시각으로 패션 산업의 상업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녀가 보그 편집장이 되자마자, 표지에 1만 달러의 티셔츠와 저렴한 청바지를 입은 무명 모델을 전면으로 내세운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럭셔리 패션에 대한 인식은 반드시 하이엔드 브랜드 조합으로만 입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었고, 보그의 광고주인 여러 하이엔드 브랜드도 이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럭셔리와 컨템포러리의 공고한 경계를 허물었다. 믹스매치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이 다양한 의류 브랜드에 다가갈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를 제시한 셈이다.
또한, 안나 윈투어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패션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인재들을 지원하며 패션계의 질적 성장을 이끌었다.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의 수석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는 안나 윈투어의 대표적인 피후견인이다. 존 갈리아노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예술성으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외면받으며 파산 위기에 처한 적 있다. 1993년, 존 갈리아노의 S/S 컬렉션을 인상 깊게 본 안나 윈투어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그녀의 인맥을 통해 여러 재정적 후원자를 소개받으며 파산 위기에서 벗어났고 1995년 마침내 지방시의 디자이너로 임명받는 등 패션계에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외에도 마크 제이콥스, 톰 포드 등 세계적인 디렉터가 안나 윈투어의 지원 속에 성장했으며, 현재까지도 신진 디자이너 발굴을 위해 힘쓰며 패션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안나 윈투어가 패션 산업의 상업적인 발전을 이끌었다면, 보그 이탈리아의 전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francasozzani1)는 비평을 통해 패션을 사회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었다.
2008년 4월, 그녀는 ‘어 블랙 이슈(A Black Issue)’를 주제로 패션 매거진 최초로 모든 모델을 흑인으로 배치한 보그 이탈리아를 출간했다. 이는 당시 패션계에 만연하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흑인 모델의 아름다움을 비판하고자 했다. 당시 콘셉트 자체가 파격적이었기에 인쇄소에서 인쇄 여부를 여러 차례 되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해당 호는 호평을 받으며 무려 3쇄 인쇄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패션계에서 다인종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다.
2011년 6월 호에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함으로써, 비정상적으로 마른 모델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패션계를 비판했다. 해당 잡지로 인해 모델의 BMI(체질량지수)를 규제하는 법안이 등장하는 등 건강한 미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았다.
지금이야 이들의 선택이 옳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당시 안나 윈투어와 프랑카 소짜니의 선택은 광고주들의 광고 집행 취소로 인해 단기적인 매출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꾸준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고, 그 결과 산업과 미디어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었다.
즉, 미디어는 객관적인 언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설령 매체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광고주가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비평이 있어야 건설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산업의 질적인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면, 현 국내 패션 미디어는 어떨까?
*해당 글은 온큐레이션에 기고된 글입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은 온큐레이션 홈페이지에서 만나보세요!
마케팅, 브랜딩, 트렌드와 관련된 인사이트를 얻고 싶다면 빌보 브런치 '구독' & 프로필 방문 클릭!
다양한 제안은 이메일(billbojs@naver.com)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