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에필로그: 왜 나는 치유농장에서 나이 들기로 했는가
이 책의 첫 장을 열며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렸다.
"얘야, 이제 집으로 가자."
차가운 중환자실 기계음 속에서 들었던 그 간절한 외침은 내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도대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진짜 '집'은 어디인가.
이제 긴 여정 끝에 나는 그 답을 이 흙 위에서 찾았다. 집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니었다. 내 몸이 가장 편안하게 숨 쉬고, 아픈 이웃들이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쉬며, 생명의 순환이 멈추지 않는 곳. 바로 이 '치유의 정원'이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셨던 집이자, 내가 남은 생을 바쳐 짓고 있는 집이다.
1. 삶의 궤적: 전환, 그리고 통합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매 순간 ‘전환’의 연속이었다. 흙먼지 날리던 청평을 떠나 낯선 서울로 향하던 소년의 불안한 발걸음, 깜빡이는 스탠드 불빛 아래서 잠을 쫓으며 버텼던 주경야독의 청춘, 미국 아이오와에서 겪은 가치관의 충격, 그리고 마침내 암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내 몸의 밭을 처음으로 들여다보게 된 멈춤의 시간까지.
이 모든 궤적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듯 보였지만, 결국 하나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치유농장’이라는 이름의 길이었다. 그래서 나의 이 마지막 선택은 과거로의 쓸쓸한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과 가치, 내가 겪어낸 모든 고통과 깨달음이 한데 모여 미래로 뻗어가는 가장 능동적인 통합이다.
2. 감사의 헌사: 나를 지탱해 준 흙과 같은 사람들
이 농장은 또한, 내 삶을 지탱해 준 이들을 향한 경의이자 감사의 표현이다.
어릴 적 불어난 흙탕물 속으로 밧줄을 묶고 뛰어드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진짜 어른'의 책임을 배웠다. 자신들의 꿈을 기꺼이 뒤로한 채, 오직 동생의 앞날을 위해 묵묵히 청춘을 바쳤던 누이들의 헌신은 내 삶의 단단한 뼈대가 되었다.
그리고 방황하던 내 삶에 살아있는 집이 되어준 아내. 당신의 믿음과 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언제나 고향의 항구를 지켜준 든든한 등대지기, 나의 동생 부부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투병의 터널 속에서 찾아온 작은 생명, 나의 손자. 너의 탄생은 내가 고통을 견디고 다시 살아야만 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이자 희망이었다.
3. 가평의 꿈: 치유가 일상이 되는 도시
나의 꿈은 개인의 정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선 이곳 가평은 이제 수도권의 변두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치유 산업의 심장이 될 것이다.
퍼머컬처의 원리처럼,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된다. 치유농업, 산림치유, 치유음식, 그리고 예술과 관광이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거대한 '치유 생태계(GCC)'를 이룰 것이다.
더 이상 은퇴자들의 쉼터가 아니다. 청년이 돌아와 일자리를 얻고, 아이들이 생태를 배우며, 노년이 존엄하게 보호받는 '순환의 도시'. 그날, 가평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미래 도시의 모델로 기록될 것이다.
4. 미래를 위한 풍경: 비석 대신 흙에 새기다
나는 훗날 내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비석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살리는 풍경'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다. 이 거대한 꿈이 실현된 도시에서, 내가 보고 싶은 풍경들은 지극히 소박하고 구체적이다.
은퇴한 선생님이 벚꽃길을 걸으며 삶의 두 번째 설렘을 찾는 눈빛, 텃밭에서 고사리손으로 씨앗을 심으며 "이것도 나처럼 자라요?"라고 묻는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환우의 편안한 미소. 이 살아있는 풍경들이야말로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은 진정한 유산이다 .
마지막 약속
언젠가 내 삶의 마지막 순간, 나는 하얀 병실 천장이 아니라 쏟아지는 별빛 아래, 혹은 내가 심은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을 것이다. 흙 묻은 손을 털며, 가장 편안한 얼굴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집에 왔습니다. 참 따뜻하고 좋은 집입니다."
나는 치유농장에서 나이 들기로 했다.
이것이 내 삶의 결론이자,
이 흙에 남기는 나의 마지막 약속이다.
나의 마지막 정원을 가꾸려는 당신에게
책장을 덮는 지금, 혹시 당신의 마음속에 작은 두려움이 일렁이고 있나요?
"나에게도 그런 정원을 가꿀 힘이 남아 있을까?"
"지금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런 당신에게, 먼저 이 길을 걸어본 동료로서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정원은, 땅을 사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발밑의 흙을 다시 느끼기로 결심하는 마음, 바로 그 'Zone 0'에서 시작됩니다.
1. 크기에 압도되지 마십시오
거창한 농장을 꿈꿀 필요는 없습니다. 1,000평의 땅이 있어야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의 화분 하나, 옥상의 스티로폼 상자 텃밭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 작은 흙 속에 바질 씨앗 하나를 심으십시오. 그리고 매일 아침 그 씨앗에 물을 주며 눈을 맞춰보십시오. 그 작은 생명이 껍질을 깨고 올라오는 순간, 당신은 이미 위대한 농부이자 치유자입니다. 정원의 크기가 아니라, 당신이 맺는 '관계의 깊이'가 치유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2. 완벽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평생을 경쟁 속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흙 위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때로는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할 수도 있고, 서툰 호미질에 작물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자연은 실패를 탓하지 않고, 그 실패마저 거름으로 삼아 다음 생명을 키워냅니다. 흙은 당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기다려줄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정원에서는 '성과'를 내려놓고 '과정'을 즐기십시오.
3.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흙을 만지는 일은 고독해 보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흙을 만지는 순간, 흙 속의 수억 마리 미생물이 당신과 악수할 것이고, 바람과 햇살이 당신의 어깨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당신과 같은 꿈을 꾸며, 어딘가에서 흙을 일구고 있는 우리가 있습니다. 힘들 때면 언제든 가평으로 오십시오. 우리가 먼저 닦아놓은 황톳길을 걷고, 투박하지만 따뜻한 밥상을 함께 나눕시다 .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구두를 벗고, 맨발로 흙 위에 서십시오. 그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당신의 마지막 정원이,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시작이 되기를. 흙 위에서,
당신의 친구 조영빈 드림.
치유농업의 길을 걷는 소중한 동료들에게
이 길은 참 외로운 길입니다. 당장 눈앞의 소득이 보장된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아주는 화려한 무대도 아닙니다. 잡초는 끝없이 자라나고, 태풍 한 번에 공들인 밭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흙과 땀과 눈물의 길입니다. 어쩌면 주변에서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으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료 여러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짓는 농사는 작물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기르는 일이라는 것을요.
1. 당신이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Zone 0의 원칙)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부디, 당신 자신을 갈아 넣어 타인을 치유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흔히 '봉사'나 '희생'이라는 단어에 갇혀, 정작 치유자인 자신의 몸과 마음이 메말라가는 것을 방치하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병상에서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불행하면 내 밭의 작물도,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치유농업의 시작점은 언제나 '나(Zone 0)'여야 합니다. 당신이 먼저 흙의 위로를 받고, 당신이 먼저 텃밭의 식탁에서 웃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행복한 에너지가 흘러넘쳐 곁에 있는 이들에게 가닿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치유 프로그램입니다.
2. 우리는 농부이자, 생명 디자이너입니다
우리의 일은 단순히 씨앗을 심고 수확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도시인이 흙을 만지며 다시 숨 쉬게 하고, 갈 곳 잃은 노인이 텃밭에서 자신의 쓸모를 발견하게 돕는 일. 우리는 무너진 생태계와 단절된 인간관계를 다시 잇는 '관계의 디자이너'들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우리가 땀 흘려 가꾼 이 치유농장은, 경쟁에 지친 우리 사회가 숨을 쉬기 위해 찾아올 마지막 비상구이자 산소 호흡기입니다.
3. 혼자 걷지 말고, 숲이 됩시다
치유농업은 혼자서 완성할 수 없습니다. '퍼머컬처'에서 토마토와 바질이 서로를 돕듯, 우리도 서로의 '동반 식물'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힘들 때면 언제든 서로의 밭둑에 앉아 쉬어가게 해주고, 서로의 지혜를 퇴비처럼 나누어야 합니다.
저의 가평 농장(PCC)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길을 걷다 지치면 언제든 오십시오. 투박한 밥 한 끼 나누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줍시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점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단단한 숲을 이룰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치유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호미질을 하고 계실 전국의 모든 치유농업 동지들께. 뜨거운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부디 흙 위에서,
건승하십시오.
가평의 치유농장에서, 여러분의 동료 조영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