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관계일수록 반드시 말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말을 줄이게 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해될 것 같고,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전해졌다고 믿는다.
이 믿음이
관계를 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착각을 키운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익숙함은
관계를 자동화한다.
상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의도를 추측하고,
표정을 보기 전에
의미를 완성한다.
마치 오래 사용한 검색창처럼
우리는 상대를
‘자동완성된 이미지’로 읽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자동완성이
자주 틀린다는 데 있다.
사람은 변하고,
상황은 달라지고,
마음의 온도는 계속 움직이는데
우리는 과거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현재의 사람을 해석한다.
이때부터 이해가 아니라
오해의 반복이 시작된다.
관계의 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상대는 말하지 않았고,
나는 이미 안다고 생각했다.
확인하지 않은 해석이
사실처럼 굳어지고
그 틈은 조용히 넓어진다.
감정의 흔적도 남는다.
상대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나는 이미 상처받아 있고,
상대는 아무 일도 없다고 느끼는데
나는 혼자 서운함을 쌓아둔다.
이 흔적은 대화가 없을수록
더 깊게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된 관계일수록
말해야 할 일은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시간이 쌓일수록
각자의 세계는 더 넓어지고
겹치지 않는 영역도
함께 늘어나기 때문이다.
예전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고,
예전엔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것들이
이제는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쉽게 어긋난다.
사람의 온도도
이때 달라진다.
말이 줄어든 관계는
차분해 보이지만
온기가 빠진 상태일 수 있다.
정확하지만 건조한 말들,
필요만 남은 대화들.
관계는 유지되지만
살아 움직이지는 않는다.
성숙한 관계는
말을 줄이는 관계가 아니라
말을 다시 선택하는 관계다.
묻지 않아도 알겠다는 착각을 내려놓고
다시 묻는 용기,
다시 설명하는 성실함,
다시 확인하는 태도.
익숙함은
말을 아끼는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말을 생략해도 되는 면허는 아니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더 많이 말해야 한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해는
시간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해는
지금도 계속 말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