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사는 이해의 실패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관계에서 가장 흔한 오류는
상대를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보고 있다고 믿는 착각이다.
우리는 종종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만든 이미지를 보고 반응한다.
이게 바로 투사다.
투사는
상대의 모습 위에
내 감정, 내 기억, 내 불안을
겹쳐 올려놓는 과정이다.
상대가 한 말보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상태가
해석을 먼저 결정한다.
그래서 같은 행동도
어떤 날에는 배려로 느껴지고,
어떤 날에는 무시로 읽힌다.
상대가 달라진 게 아니라
내 안의 렌즈가 달라졌을 뿐이다.
투사가 작동하는 순간
관계의 틈이 생긴다.
상대는 설명하지 않은 의도를
이미 오해받고 있고,
나는 확인하지 않은 감정을
이미 사실로 받아들인다.
이 틈은 대화로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딪히는 건 말이 아니라
각자가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흔적도
이 지점에서 쌓인다.
실제로는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대하고,
실제로는 품지 않은 마음에 대해
실망한다.
상대는 이유를 모르고
나는 점점 확신한다.
“역시 이 사람은 이래.”
사람의 온도 또한
투사 앞에서 왜곡된다.
따뜻했던 사람은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고,
차분했던 태도는
무관심으로 해석된다.
온도가 바뀐 게 아니라
해석의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투사가 무서운 이유는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내 해석을 의심하지 않고
상대의 태도를 먼저 판단한다.
하지만 이해의 오류는
대부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보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숙한 관계는
투사를 없애는 관계가 아니다.
투사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관계다.
“이건 상대의 문제일까,
아니면 내가 덧씌운 해석일까.”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때
관계는 다시 실제의
사람을 향해 돌아온다.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은
상대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렌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상대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만든 상대를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해석과 해석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해석을 바로잡는 순간
비로소
진짜 상대가 눈앞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