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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UKGEE Oct 22. 2020

우리의 여름방학

이 글은 지난 여름 8월에 쓴 글입니다.

중학생 큰 아이는 이번 주에 여름방학식을 한다. 초등학생 둘째는 이미 여름방학 2주 차다. 학기 초 코로나로 개학이 늦어진 탓에 여름방학이 터무니없이 짧다. 중학교는 1주, 초등학교는 3주. 학기 중에 등교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방학이라 달라진 것이라면 온라인 수업이 없어 자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많아졌다는 정도이다. 그리고 나는 새벽마다 온라인으로 두 아이 각각 나이스 학생 건강상태 자가진단 시스템에 접속해서 ‘이상 없음’을 체크하지 않아도 된다. 그 외에는 달라질 것이 딱히 없다. 지겹도록 신나게 물놀이를 했던 작년이 먼 과거였던 것만 같고, 올해 여름은 기대도 하지 말라는 듯 작렬하는 태양 대신 기록적인 긴 장마로 날씨마저 심술을 부리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그 여느 때보다 안타까운 여름방학이다. 하지만 코로나 전이나 후나 일하는 엄마에게는 아이들의 여름방학은 안타까움과 상관없이 언제나 부담스럽다.


아이들은 방학이어도 나는 출근을 해야 하니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하루 종일 집에서 머문다. 연중 틈틈이 휴가를 쪼개어 써야 하는 나는 하계휴가를 길게 쓸 수가 없다. 그래도 여름방학인데 이렇게 지나가게 할 수는 없기에 주말에 앞뒤로 하루씩 붙여 간단하게 가까운 가평으로 이른 휴가를 다녀오긴 했다. 남은 방학 1주일은 외가에 가 있기로 했다. 내가 1주일 휴가를 낼 수 없어 주말에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올라와야 한다. 친정이 있는 양산에는 가까이 동생네도 있어서 아이들은 이모와 이모부, 이종사촌 동생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외가에 가는 것을 항상 좋아라 한다. 외할머니가 해 주시는 맛있는 집밥도, 끓기지 않는 간식거리도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이다. 다만 삼시세끼 아이들 밥부터 챙겨야 할 외할머니에겐 고생스러운 1주일이 되실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외동인 어린 조카를 봐주고 계신 터라 우리 아이들이 가면 조카에게는 손이 덜 가서 편한 것도 있다 하시며 손녀들을 반기신다.


나의 제대로 된 여름방학은 방학 보충수업이라는 것이 없었던 초등학교 때까지였다. 아빠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방학이면 우리 집에는 보충수업기간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집에 하루 종일 머문다. 방학이라고 빈둥거리는 것을 이쁘게 봐줄 부모는 없었다. 우리 집은 특히 아빠가 엄하셨기에 아빠가 보충수업으로 출근하시는 날은 잔소리 없이 편히 늦잠을 잘 수 있었다. 아빠가 집에 계실 때에는 아침밥 먹고 바로 아파트 놀이터로 나가거나 동네 친구들 집을 돌아다니며 놀거리를 찾아다녔었다. 그 시절 우리 집에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원거리 여행은 하기 어려웠고, 방학 때마다 버스 타고 힘들게 합천 시골 외할머니댁에 다녀오는 게 다였다.  


우리 집에 차가 생긴 것은 3학년 여름방학 직전이었다. 직전 겨울방학 기간 동안 부지런히 운전학원을 다니신 아빠와 엄마는 나란히 운전면허를 따셨고, 차를 사기로 결전하셨다. 지인의 지인을 통해서 소개받아 구입한 중고차는 누런 메탈릭 컬러의 프레스토였다. 드디어 우리 집에 발이 생겼다. 그때부터 아빠는 어딘가로 나갈 계획을 세워 경상도 내의 국립공원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우리 집은 그렇게 캠핑을 시작했다. 크지 않은 트렁크에 4인용 텐트와 어디선가 빌려온 파라솔 테이블, 스티로폼 아이스박스를 겨우 구겨 넣고 출발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국립공원 자연보호 때문에 금지되어 엄두도 못 낼 곳들에서 30년 전이라 가능했던 캠핑을 했다. 캠핑용 버너와 코펠 세트까지 구비하였으니 요즘 유행인 새내기 캠핑족이었다. 가벼운 정리벽과 결벽증까지 있으신 깔끔쟁이 아빠에게 야영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닷가 짠내를 무척 찝찝해하는 아빠를 위해 바다 대신 산과 계곡으로만 찾아다녔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내 동생은 계곡에 도착하면 튜브에 바람 넣고 물에 들어갈 생각부터 했다. 국립공원 오르는 길에 대강 주차를 하고 아빠가 텐트 칠 곳을 찾아 짐을 푸는 동안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국도로 3~4시간 이상을 운전해 오신 아빠는 물 한 모금 마실 틈 없이 국립공원 계곡에서 울퉁불퉁한 바닥의 자갈은 긁어내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후 방수용 비닐과 돗자리를 깔고 텐트를 쳤다. 요즘 텐트는 텐트폴 끼우기도 편리해졌고 툭 던지기만 해도 되는 원터치 텐트도 있던데, 그때에는 텐트 치는 것은 어른 2명 이서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텐트를 치고 나면 그 둘레로 행여나 비가 오면 물이 차지 않도록 삽으로 배수로를 파고, 그 주변에 뱀을 쫓기 위해 챙겨 오신 백반가루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엄마는 약수통에 담아온 물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셨다. 텐트가 올라가자마자 우리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계곡물로 달려갔다. 계곡물이 우리 허리 아래 정도 오는 곳에서 놀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서 위험할 일이 없었다. 내 기억에 계곡에서의 야영은 불편함은 없었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나의 즐거웠던 옛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계곡에서의 야영을 하는 동안 엄마, 아빠는 한시도 제대로 앉아서 쉬지 못하셨고, 엄마는 계곡물에 발은 담그셨는지도 기억에 없다. 차에 짐을 싣고 집을 떠나 출발하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순간까지 두 분은 고생길이셨을 거다. 지금처럼 캠핑장 주변 편의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물도 근처 약수터까지 가서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받아와야 했고, 샤워장이 별도로 없어서 씻는 것도 계곡물에 씻어야만 했었다. 마냥 즐겁게 놀고 먹여주고 씻겨 주는 부모님 덕에 나에게는 불편함의 기억도 거의 없는데, 두 분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지금의 나라면 한번 해보고 다시는 안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우리의 여름 캠핑여행은 내가 중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나와 동생은 부모님께 딱히 어딜 가자고 조르거나 청한 적도 없었기에, 자라오면서 우리 자매는 엄마, 아빠가 여행을 좋아하셔서 그렇게 방학마다 돌아다닌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과연 그렇게 고생스러운 그 자체로의 야영을 즐기셨던 것일까? 어린 시절 가족여행을 할 수 없었던 두 분은 건실한 가정을 꾸려서 자녀들과 가족여행을 다니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 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뿌듯하고 좋아서였을까? 직접 부모님께 물어본 적이 없어서 정답은 모르지만, 우리의 여름방학이 두 분의 수고스러움 덕에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여름방학이 아이들에게나 즐겁고 좋은 것인지 부모인 나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독박 육아를 핑계로 투덜대고만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도 지난 여름 방학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1주일 내려보낸다. 안타까운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던 아이들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배려와 희생으로 좀 덜 안타까운 여름방학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여름방학은 채워주시던 엄마, 아빠가 내 아이들의 여름방학까지 채워주고 계신다. 딸의 당연한 수고스러움조차 안타까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으시고 손녀들을 기꺼이 받아주신다. 아이들의 여름방학은 부모인 내가 여름방학답게 만들어 줘야 한다. 그래서 여름방학은 당연히 부담스러워야 하고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의 여름방학이 그렇게 채워졌듯이 내 아이들의 여름방학도 내가 채워줄 수 있으리라. 이 당연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이들의 여름방학은 나에게도 꽤나 설렘으로 다가온다. 겨울방학도 아니고 바로 그 여름방학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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