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회 언니_'너희 학번부터 우리 학과가 이름이 바뀌면서 신설 단과대에 들어가게 됐어. 그래서 단과대 학생회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해.'
(빈아와 학생회 언니가 대화하는 중이다. 빈아 옆에 텍스트 박스로 그때 빈아가 맡았던 역할이 적혀 있다. / 빈아(20살 / 17학번) _ 1학년 과대 & 신설 학과 학생회장 & 신설 단대 비대위원 & 중운위원)
갑작스럽게 큰 감투를 쓰게 된 그 해 여름, 나는 동기 몇 명과 함께 집을 짓기 위해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버스에 올라탄 빈아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눈다.)
학교 봉사단과 함께 신설 단과대 학생들이 참여하는 '해비타트' 주관 집짓기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를 바라보는 빈아. 건축 자재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 들어서 활동 첫날엔 정말 좋았다. 다른 학과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설렜고, 집을 짓는다는 것이 정말 의미 있게 다가왔다.
(다 같이 집을 짓는다. 건물의 큰 뼈대가 세워져 있고 빈아와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망치질을 하는 모습. 미니어처로 표현.)
그러나,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평소보다 무리했던 탓일까, 그 설렘에 앞섰던 나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몸살을 앓았다.
빈아_'더워... 어지러워...'
(햇볕을 바라보던 빈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힘이 없어 보인다.)
다음날, 작업을 이어가야 했지만 얼마 못 가 정말 쓰러질 것 같았고, 함께 있던 교직원분의 도움으로 차 안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힘이 없어 그대로 녹초가 되어 늘어졌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기에 몸이 아픈 것보다 미안해서 더 힘들었다. 체력 생각하지 않고 무리한 스스로도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차 안에 앉아 쉬고 있는 빈아. 작업 중인 현장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은 그래도 가길 잘했다는 거였다.
(돌아오는 버스 안. 버스 밖에서 바라본 빈아의 모습. 흐뭇한 표정.)
지금 경남 합천 어딘가에 내 손길이 닿은 건물이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구석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우리들의 이름이 그렇게 재밌고 뿌듯할 수가 없다.
(완성된 가상의 집. 구조물 뒤편에 적힌 우리들의 이름.)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3/12/08 업로드
5-(5-1-2) 스쳐가는 기회와 짧은 망설임 _ 축제 기획단
같은 해 가을, 나는 중운위원장이 되어 캠퍼스 대표가 되었고, 학교 축제 기획단을 운영했다.
(축제 현수막이 설치되고 있고, 빈아가 현장을 체크하고 있다.)
학교 생활과 학생회, 축제 기획단 활동을 동시에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축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대규모의 행사였기에 잘하고 있는 건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로 어떻게든 해냈다.
(무대 아래, 어두운 곳에 서있는 빈아. 축제를 즐기는 학생들을 바라본다.)
이틀간 이어진 축제는 몇 달간 고생해서 뛰어다닌 보람은 있었지만 이전 행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흔한 축제였다. 오히려 그 축제를 다채롭게 만들어준 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빈아_세상에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플리마켓 부스를 바라보는 빈아.)
그다음 해에 이어진 축제를 겪고 나니 우리가 준비했던 축제가 굉장히 미흡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던 행사가 행사 다웠을 리 없었다.
빈아_학우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축제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학교를 둘러보는 빈아.)
그래도 1학년 신입생이, 심지어 대학교 축제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내가 힘들 때마다 수십 번씩 마음을 다잡으며 어떻게든 해냈던 게 정말 멋지다. 그런 순간들에서 나는 더욱더 단단하게 성장했다. 여러모로 값진 경험이었다.
빈아_언제 그런 큰 행사를 기획해 보겠어.
(거길 지나쳐 나오는 빈아.)
나는 그 해에 학과 1학년 과대, 신설 학과 학생회장, 신설 단과대 비대위원장, 중운위원장을 겸임하며 축제 기획단을 운영했다.
(빈아가 여러 개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
학업에도 충실히 임했고, 학과 한복 동아리 활동도 했다. 창신동에서 청춘들과 함께 지역 활동도 했고, 짧은 사랑도 했다.
(그 짐을 짊어진 채로 여기저기 나무를 심고 있다. 각 나무에 학업, 동아리, 대외활동, 사랑이 적힌 팻말이 꽂혀 있다.)
근데 이건 내 대학 생활 전체를 봤을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열심히, 많은 걸 경험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땅에 팻말이 꽂혀 있다. 앞으로 더 많은 나무가 심어질 것을 암시.)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감투를 쓰게 되었지만, 그걸 통해 파생된 활동들에 큰 망설임 없이 참여하고 도전하며 그렇게 찾아오는 우연한 기회들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았던 내가 대견하다. 그 대담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지금의 빈아가 그때의 빈아를 바라보는 모습.)
대학 입학 전 학교에 대해 알아보던 중, 내가 지원하려는 학과가 신설 단과대 개설과 함께 소속과 이름이 바뀐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존 학과 커리큘럼과 교수님, 강의실 등은 거의 변화 없이 가되, 사회의 흐름에 맞게 학과 이름만 바꿔서 다른 신설 학과와 함께 신설 단과대에 들어가게 된 것인데, 어쨌든 새로 생긴 거였기 때문에 그 역시 각 학과 학생회와 단과대 학생회가 독립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들어가자마자 신설 단과대 소속 학과의 학생회장(우리 학과에서는 1학년 과대였지만, 공식적으론 1학년밖에 없는 신설 단과대 신설 학과의 학생회장이었다)이 됨과 동시에, 단과대 비대위원(단과대 학생회 지원자가 없거나 투표율 미달로 선출되지 않았을 경우 다음 선거 때까지 소속 학과의 학생회장들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이 되었다.
그렇게 큰 감투를 쓰게 된 그 해 여름, 학교 봉사단과 함께 신설 단과대 학생들이 참여하는 '해비타트'주관 봉사 활동이 있었다. 경남 합천으로 내려가 집 짓는 봉사를 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소식을 접했을 땐 (물론 나는 무조건 가야 되는 입장이었지만) 2박 3일 동안 서울을 떠나 집을 짓는 봉사를 하고 타 학과 사람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큰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흔쾌히 동행해 준 동기들과 함께 무더운 합천으로 내려갔다.
현장은 생각보다 고됐다. 집을 짓는 활동이다 보니 무거운 건축 자재들을 이리저리 날라야 했고, 주변에 뜨거운 햇볕을 피할 곳이 없어 그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그래도 손발을 맞춰 다 같이 움직이다 보니 서서히 건물의 뼈대가 생기는 게 눈에 보였고, 그 덕에 피로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엔 한 구석에 학교, 학과 이름과 함께 이름을 새겨 넣으며 우리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설렘으로 쉬지 않고 일했던 탓일까, 그날 숙소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쓰러져 몸살을 앓았다.
다음날도 작업을 이어가야 했는데,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지럽고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고 있는 햇볕 아래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 있으니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함께 간 교직원분이 그런 내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더위를 먹은 것 같다며 차에 가서 잠깐 쉬라고 하셨다. 에어컨이 틀어진 차 안에 있으니 그나마 살 것 같았지만, 다시 현장으로 갈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중이었기에 어지러운 것보다 미안해서 더 힘들었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고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은 그래도 가길 잘했다는 거였다. 온전히 참여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함께 한 사람들과 뜻깊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만약 내가 1년 먼저 태어나 한 학번 위로 학교에 들어갔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학생회가 아니었다면 선뜻 도전하기도 더 망설여졌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찾아오는 우연한 기회들을 붙잡다 보면 정말 다채로운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래서 정말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게 한 계기가 되었던 순간이었다.
지금도 경남 함천 어딘가에 내 손길이 닿은 건물이 있다는 것이 두고두고 나를 아련하게 만든다. 완성된 집구석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새겨져 있을 우리들의 이름을 생각하면 그렇게 재밌고 뿌듯할 수가 없다.
같은 해 가을, 총학생회 공석으로 중앙운영위원회(이하 중운위, 각 단과대 대표들로 구성)가 비대위 채제로 운영되면서, 두 개의 캠퍼스를 각각 대표하는 임시 위원장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 우리 학과가 속한 단과대의 비대위원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정기 회의가 열렸던 날, 캠퍼스의 대표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 1학년인 데다 경험이 없어서 다른 위원들이 우려하긴 했지만, 맡게 된 이상 이것저것 물어가며 어떻게든 해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다가오는 가을 축제를 준비할 기획단이 없어 그걸 위해 사람을 모으는 것부터 해야 했다.
축제 기획단은 여러 팀으로 나눠서 모집 및 운영되었는데, 나는 전체를 총괄하며 홍보/미디어부 팀장을 맡았고, 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SNS 계정을 운영하며 소식들을 공유했다. 축제는 이틀간 이어졌는데, 플리마켓과 푸드트럭, 각종 체험 행사 및 무대 공연 등 이전 행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신박하지 않은 축제였다. 기획한 우리들은 몇 달간 정말 고생해서 뛰어다녔지만 정작 그 축제를 다채롭게 꾸며준 건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학교에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었고, 흔쾌히 학교에 찾아와 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때 고등학교 때 친구였던 댄서를 섭외했었는데, 그 크루가 왔을 때도 얼마나 고맙던지. 무대가, 아니 무대에 선 모두가 빛이 났다.
그 다음해에 이어진,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진행된 축제를 겪고 나니 우리가 준비했던 축제가 굉장히 미흡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도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축제가 재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축제였을까에 대한 확신은 없다. 특히 연예인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나는 축제 업체와 다른 기획단원들의 의견만을 듣고 움직였다. 예산을 사용하는 것에 주도권이 없다 보니 더욱 그랬던 것도 있다.
1학년 신입생이, 심지어 학교 축제를 경험해보지도 못한 내가 언제 그런 큰 행사를 기획해 보겠냐며 힘들 때마다 수십 번씩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해내야 했던 순간들에서 나는 더욱더 단단하게 성장했다. 여러모로 값진 경험이었다.
나는 그 해에 학과 1학년 과대, 신설 학과 학생회장, 신설 단과대 비대위원장, 중운위원장을 겸임하며 축제 기획단을 운영했다. 학업에도 충실히 임했고, 학과 한복 동아리 활동도 했다. 창신동에서 청춘들과 함께 지역 활동도 했고, 짧은 사랑도 했다. 근데 이건 내 대학 생활 전체를 봤을 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열심히, 많은 걸 경험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그런 감투를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을 텐데, 그걸 통해 파생된 활동들에 큰 망설임 없이 참여하고 도전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대견하다. 아니, 대담했다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