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백스테이지에서 일했기 때문에 쇼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중간중간 빠져나와 눈으로 담았던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쇼를 보며 황홀해하는 빈아.)
그 웅장하고 멋진 광경을 잊을 수 없었던 우리는 건의사항의 반영으로 패션쇼, 공모전, 창업 등 졸업 요건의 선택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패션쇼를 열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친구들과 대화하는 빈아. '너는 뭐 할 거야?' '나는 패션쇼.')
그렇게 쇼를 선택한 친구들끼리 모여 졸업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다가오는 4학년 1학기를 준비했다. 나는 그때 학생회 임기를 마무리하는 중이어서 위원회까지 하는 욕심은 진작에 버린 상태였다.
(졸업준비위원회 친구들끼리 회의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문 밖에서 지켜보며 응원의 미소를 보내는 빈아.)
그런데 그해 겨울, 코로나19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뉴스 화면. 코로나19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개강과 동시에 디자인 스케치를 마치고 패턴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쇼를 취소하려면 하루빨리 결정해야 했다.
(방에서 비대면 수업을 듣고 있는 빈아. 화면에 교수님과 친구들 얼굴이 보인다.)
코로나19와의 싸움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이미 여러 곳에서 행사를 취소하는 흐름이 보였기 때문이다.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는 빈아. '우리 학교는 쇼 취소됐어....')
2학기에 쇼를 진행하는 대학들도 있었지만 우린 1학기에 진행되어야 했고, 전염병으로 인해 패션쇼를 영상 촬영이나 전시로 돌린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마스크를 쓰며 거울을 보는 빈아.)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3/11/24 업로드
5-(4-2-2) 졌지만 잘 싸웠다 _ 어벤져스의 공모전 수상
그렇게 졸업 패션쇼가 무산되고, 나머지 선택지 중 할 수 있는 걸 선택해야 했다.
(졸업 프로젝트 아래 선택지들이 펼쳐져 있고, 빈아가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마음 맞는 동기들과 함께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다.
(화면에 있는 교수님께 말씀드리는 빈아. '저는 친구들과 공모전에 나가기로 했어요.')
우리가 선택한 공모전은 한 시즌의 컬렉션과 마케팅, 홍보 방안 등을 모두 기획해야 했던 프로젝트였다.
(비대면으로 회의하고 있는 화면.)
그래서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으로 나눠서 진행했고, 나는 디자인팀에 들어가 친구와 함께 이미지맵부터 컬러보드 제작, 소재 선정, 디자인, 도식화 작업을 했다.
(디자인을 하고 있는 빈아와 친구. 각자의 집에서 하고 있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옷을 만들어보지도 못하고 그 부푼 꿈을 접어야 했지만 우린 어벤져스였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기획안을 만들어갔고
(사방에서 모인 자료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렇게 장려상을 수상하게 됐다.
(컴퓨터 화면. 수상 명단에 팀명과 빈아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래도 의류학과의 꽃이라 불리는 졸업 패션쇼를 해보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쉽다.
('의류학과요? 그럼 졸업 패션쇼 하셨겠네요?' 질문을 듣고 말이 없는 빈아.)
뭐든 잘하는 우리가 모여 쇼를 열었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 말이다.
(위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한 빈아.)
의류학과에 진학하고 나서부터 우린 졸업 패션쇼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들을 녹여 제대로 실력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고, 다 같이 고군분투하며 하나의 행사를 기획해 보는 일을 경험해 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막학년에, 한 번뿐인 졸업, 그 졸업을 앞둔 멋진 퍼포먼스가 우리를 내내 설레게 했다. 코로나19가 발현되기 전까지 말이다.
하필, 이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다. 왜 하필 내가 본격적으로 쇼 준비에 들어가는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 학번이라면 정말 멋지게 해낼 수 있는데, 그 기회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무산되는 게 정말 속상했다. 1학년 때 봤던, 선배들의 그 화려한 패션쇼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는 우리들에게 너무 가혹한 상황이었다.
정말 이렇게 취소되는 건가, 싶었던 순간, 정말 취소되고 말았다. 개강해서 디자인 작업을 마치고 패턴 작업에 들어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미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고 있긴 했지만, 나는 내 방에서 멋진 꿈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만들어보지도 못한 채 접어둬야 한다니. 정말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고, 우린 다른 선택지 중에 선택해야 했다. 그중엔 수강을 취소하고 내년 쇼에 도전해 보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졸업을 미룰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공모전에 도전하기로 했다. 원래 우리 학과는 졸업을 하기 위해선 패션쇼에 참여하는 게 필수였는데, 여러 번 건의한 끝에 '졸업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쇼뿐만 아니라 공모전, 창업 등 다양한 선택지가 열렸다. 그중 하나를 이수하면 졸업 요건이 충족되는 방식이었다.
우리가 선택한 공모전은 그 공모전에 참여한 브랜드들 중 하나를 정해 그에 맞는 디자인과 마케팅, 홍보 방안들을 전부 기획해야 하는 큰 프로젝트였다. 그때 우리가 정했던 건 여성 오피스룩 브랜드였고, 여러 회의를 거친 끝에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영감을 받은, 편안하지만 우아함은 잃지 않은 오피스룩을 기획하기로 했다. 일을 하다가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는 디자인으로 구상했고, 컬러도 분홍색 계열을 많이 사용해 브랜드 이미지에 잘 맞도록 했다. 4인 1조였던 우리는 마케팅과 디자인팀으로 나눠 진행했고, 나는 디자인팀에서 친구와 함께 의상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맡았다.
디자인을 하기 전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봤는데, 흑백이었지만 정말 로맨틱한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멋진 영화였다. 그 감성을 의상에 녹여내기 위해 이미지맵부터 컬러보드를 제작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고, 수많은 스케치 작업을 거쳐 최종 착장을 정해 멋진 일러스트까지 담았다. 그렇게 양질의 기획안을 제출하며, 우리의 졸업 프로젝트는 마무리되었다. 후에 장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우리가 비록 막학년에 코로나19와 만난 비운의 학번일지라도 멋지게 잘 싸웠다는 생각에 대견함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나는 3학년 때 외부 동아리에서 패션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 연출하며 디자이너로서 옷도 제작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쇼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었다. 단지 졸업 패션쇼라는 그 이름에서 오는 아쉬움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코로나19가 발현되었다면 나는 그 쇼도, 졸업쇼도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라기 보단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멋진 프로젝트를 하나 기획해 보며 좋은 경험을 했다. 브랜드에 디자이너로 들어간다면 이렇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진로 고민도 할 수 있었고, 친구들과 우정도 끈끈히 다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