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한복 브랜드에 들어간 지 3개월이 채 안 됐을 무렵, 나는 사수님께 퇴사 의사를 전한 후 회사를 나오기까지 약 2주간 '퇴사 일기'를 썼다.
(퇴사 일기를 쓰는 빈아.)
퇴사를 통보한 날부터 퇴사 당일까지의 생각들을 기억하고 싶었고, 내 결정에 후회가 없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기 위함이었다.
빈아_정말 후회 안 할까?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에 잠긴 빈아.)
실제로 중간에 팀 이동 제한이 들어오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며 결정을 무를까도 생각했지만
친구1_그래도 디자인팀으로 옮겨서 조금 더 버텨보는 게 어때? 그래야 정말 미련 없지 않을까?
친구2_지금의 기회가 언니에게 찾아올 기회의 전부가 아니야. 나중에 또 다른 기회가 올 거고 언니는 충분히 그걸 잡을 수 있는 사람이야.
(주변의 조언을 듣는 빈아.)
퇴사 일기엔 주로 이런 문장들이 적혔고,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곧 내가 내릴 결정이었다.
(다시, 퇴사 일기를 쓰는 빈아.)
'마음이 여유롭고 평안하다.' '괜히 아련해지지 말자. 담백해지자.'
(자기가 쓴 글을 바라본다.)
'그래도, 퇴사하자.'
(일기장을 '탁' 접는 빈아. 결심이 섰다.)
그렇게 퇴사 일기를 쓰며 그 회사에 오기까지의 나와 회사를 다녔을 때의 나를 조금씩 돌아보며 마음을 정리했다.
(대학 생활, 회사 생활을 했던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빈아.)
그리고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지를 제대로 묻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미래를 상징하는 태양(일출)을 바라본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 중인 이들에게 '퇴사 일기'를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결국 처음과 같은 결론이 나더라도 더 미련 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선택의 이유와 함께 삶의 방향성도 함께 찾을 수 있다.
(미소 짓는 빈아의 얼굴 클로즈업.)
*퇴사 일기 전문
[22/06/15 (수) 퇴사 통보 당일]
출근하기 전, 엄마에게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하고 나왔다.
" 오늘 말씀드릴 거야. "
점심시간이 되고, 사수님께 퇴근 후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사수님의 불안한 눈동자를 뒤로하고, 다른 팀 대리님과 함께 셋이 밥을 먹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무렵, 아무래도 얘가 무슨 말을 할지 들어야겠다는 사수님의 표정이 읽혔다.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고 하셔서, 카페로 따라나섰다. 그렇게 6월 말까지만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 점심시간부터 저녁식사까지 사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사수님은 이미 짐작하셨다는 듯이 덤덤해 하시면서도 많이 아쉬워하셨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같이 했다 보니, 그것들의 결과를 직접 보지 못하고 나가는 게 아쉽다고.
일을 하면서 많이 배우고 성장했지만, 3개월간 무너졌던 몸과 마음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진로 고민을 다시 해서, 맞는 걸 찾고 그것을 배우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특정 사람들 때문에 힘들었다는 얘기도 했다. 초반에 너무 힘이 빠진 나머지 미래를 기대할 만큼의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말하면서 절대 울지 않아야지 다짐했지만, 나는 내가 울 걸 알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말하면서 그냥 눈물이 흐른 것도 있지만, 사수분의 좋은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와닿아서 울컥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다른 팀 분들이 지나가다 보셨다는 게 조금 그랬지만, 어차피 나갈 거면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충분히 힘들었고, 충분히 고민했다. 내 뜻을 믿어주어야 한다.
퇴사를 입 밖으로 꺼낸 후, 나에게 많은 응원을 줬던 가족들, 사수님, 주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던 하루다.
[22/06/16 (목) 앞으로 남은 날, 11일]
대표님부터 실장님까지 하나둘씩 내 퇴사 소식이 전해졌다.
진짜 이젠 퇴사가 실현될 것이다.
지금 이건 무슨 기분일까.
시원하지도, 섭섭하지도 않다.
다만, 아쉬움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잘 해보려고 했고, 힘든 와중에 몸을 일으켜, 그래도 첫 직장에서의 일들이 안 좋게만 기억되긴 바라지 않아서 하루하루 버텼다. 그렇게 버텼던 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퇴사가 확정되고 나니, 별로 바쁘지 않다. 어쩌면 이제야 일이 조금 익숙해진 것일까. 그래도 퇴사의 뜻을 바꾸진 않았다. 굳게 마음먹고, 단단해지기로 했다.
나에게 별말 없이 그저 '잘했다'라고 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그 한마디면 되었다.
[22/06/17 (금) 바쁘지 않다]
퇴사할 때가 정해지고 나니, 원래 해야 했던 일들이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일로 바뀌었다. 그래서 입사한 이후 제일 안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본사 행사가 한창인, 어쩌면 모두가 붕 떠있고 바쁜 이 시기에 나 혼자 우두커니 있으니 조금은 허한 느낌이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셨던 분들이 최근 들어 친절해지셨는데, 거기에 속지 않기로 했다. 그들이 화를 낼 때보다 화냈다가 다정해지는 그 양면성에 힘들어했던 거니까. 나의 퇴사 소식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는 상관없다. 결국 내가 회사를 떠나 나를 찾는 과정 속에 있을 때, 계속 고여있을 그분들이 안쓰러울 뿐.
이제는 그분들에 대한 감정도 정리하려고 한다. 계속 안 좋게만 가지고 있으면 나에게 도움 될 건 하나도 없다. 신입이 정신 차리고 실수하지 않게 하려고 하셨겠지, 그러다 보니 그러셨겠지, 이건 이래서 이러셨겠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퇴근하고 후배들 졸업 전시회를 다녀왔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후배들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고생한 게 눈에 보여서 대견하기도 했다. 젊음의 기운과 꿈의 기운이 가득한 학교라는 공간에서 조금의 위로를 얻었다.
우연히 마주친 선배님과 같이 저녁을 먹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기에, 정말 소중한 대화들을 많이 나눴다.
저, 이런 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오, 잘 맞을 것 같은데? 해봐!
덕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22/06/18 (토) 주말이 오고]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을 조금 더 얻었던 하루였다. 마음에 여유도 생겼는지 하얀 옷에 빨간 오징어볶음을 (아주) 심하게 흘렸음에도, 옷이나 사지 뭐 하고 넘길 수 있었다.
내가 단단하고, 평화로우면 주변의 공격에 덤덤히 대응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어찌어찌 쌓아왔던 내 안의 단단함이 근 3개월간 힘없이 무너진게 확실했다.
그것을 다시 쌓아올리고 싶고, 나를 찾고 싶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퇴사를 외쳤던 그 용기에 대견함과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22/06/19 (일)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일요일]
다가오는 월요일이 두렵지 않다. 그 월요일이 두려워 일요일까지 두려웠었는데.
스트레스 받아서 속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지도 않다.
마음이 여유롭고 평안하다.
그래도 출근이 싫은 건 마찬가지지만 확실히 다르다. 9일만 더 나가면 3개월의 직장인 생활이 끝나는데, 미련도 없고 단지 약간의 아쉬움만 있다. 그 아쉬움이 붙잡힐 정도는 결코 아니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불안도 아니다. 내가 했던 것들의 마무리를 못 짓고 나오는 것 때문이다. 일에 대한 욕심은 늘 있었으니까.
남은 기간 사수님 잘 서포트해서 평소처럼 일하다 나오고 싶다.
괜히 아련해지지 말자. 담백해지자.
[22/06/20 (월) 대표님과의 전화]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일찍 출근했다. 회사 근처를 산책한 후 정자에 누워 있다 가기 위해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잡기 위해,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했던 방법이었는데, 퇴사가 확정되고 나니 그저 편안히만 누워있어도 되었다. 온전히 그곳을 느꼈다.
오늘은 지난주보단 조금 더 바빴는데, 찜찜했던 일처리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덜 혼나긴 했지만 전화벨 소리와 목소리, 그 모든 상황들이 근 3개월간 겪었던 힘든 경험들을 다 떠올리게 했다. 이게 트라우마라는 것인가. 가슴이 조금 답답해졌다.
원래 이달 말까지 근무 예정이었는데, 그 다음날 회사 내부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서 그날까지 나오기로 했다. 사수님 전화를 당겨 받다가 대표님과 우연히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나 같은 인재를 잃어서 너무 아쉽다고 하셨다. 굉장히 안타까운 말투였고, 평소 단호하다고만 생각했던 분의 반전 모습이었기 때문에 약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
덩달아 아련해질 뻔했다.
7월 1일, 어쩌면 회사의 경사인 그날 퇴사를 하는 사원 두 명을 초대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도, 그 자리가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22/06/21 (화) 아쉬워할 때 떠나라]
시간이 참 안 간다. 하루하루가 길다기보단, 퇴사가 가까운 듯 가까워지지 않는, 그런 묘한 느낌이 이어져서인 것 같다.
○○씨랑 이렇게 아이디어 내고 하는 게 좋은데, 이렇게 잘하는데, 오늘 사수님이 시무룩하게 흘리신 말이다. 나를 아쉬워해 준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가 그래도 있는 동안 나름 애쓰고 버텨가며 이뤄낸 것들이 곳곳에 남아있구나, 헛살지 않았구나 느꼈다.
그리고 오늘은 아쉬울 때 떠나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물론 내 경우엔 '상대가 나를' 아쉬워할 때겠지만. 서로가 아쉽지 않을 때 이별하는 것 만큼 공허한 건 없는 것 같다. 다행이다. 아쉬울 때 떠날 수 있어서.
[22/06/22 (수) 사직서 작성]
내일은 아끼는 대학 후배들과 약속이 있고, 금요일엔 마지막 월차를 쓰기로 했더니 이번 주는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회사를 다니면 수요일이라는 요일은 정말 애매한 날이다. 힘든 월, 화를 견뎠는데 여전히 그 연장선인 느낌이면서, 굉장히 익숙한 느낌의 하루이고, 금요일이 가까워진다는 아주 살짝의 기대감도 있다.
오늘은 재경실로부터 사직원 종이를 받았다. 입사 일자와 사직 일자를 적게 되어 있었고, 사직 사유를 적는 란이 있었다. 다양한 사유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간단히 적었다.
나는 안다. 그 짧은 두 마디에 근 3개월이 다 담겨 있다는 것을. 그 3개월이 나에게 어떠한 3개월이었는지를. 그걸로 되었다.
[22/06/23 (목) 직무 이동제안]
지금 일하고 있는 회사에서 다른 직무로 일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적은 있다. 사직서 결재를 받으며 그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순간적으로 정말 혹해서, 확실한 대답을 보류했고, 사직서를 제출하지 못한 채 퇴근을 했다. 그 말씀과 상황들이 모두 진심이셨기에 나도 진지해졌던 것 같다.
원래 내가 원하던 직무여서 더 그랬다.
조금 행복하기도 했다. 나를 붙잡고, 다른 직무에서 데려가려 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나를 좋게 봐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구나, 사랑을 받았구나, 느꼈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22/06/24 (금) 어쩌면 마지막 월차]
퇴사를 확정하고 마지막 월차를 사용했다. 아니 사실 지금은 퇴사가 확정인 상태는 아니다. 다른 직무로 옮기는 것에 대한 제안까지 거절해야, 진짜 퇴사를 하는 것인 상황이다.
주말을 포함해서 3일 동안 고민해 보면 답이 나오겠지, 싶었는데 아직 잘 모르겠다.
금요일까지의 생각은, 그래도 퇴사다.지금의 기회가 앞으로 나에게 올 기회의 전부일까 싶다.
그런데도 고민을 하고 있는 이유는, 사실 준비된 퇴사가 아니고, 퇴사 후 나를 회복시키며 하고 싶은 일이 진짜 무엇인지 찾기 위한 퇴사라서 어떻게 보면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내가 만약 글을 쓴다 하더라도 쌓여있는 것이 적다. 현재의 내 스토리는 뭔가 크게 이룬 것이 없이 '일단은' 마침표를 찍는 느낌.
[22/06/25 (토) 퇴사 전, 마지막 주말]
퇴사 전 마지막 주말이었을 오늘, 다른팀 이동 제안을 받고 나서인지 고민만 많았던 하루였다. 같은 업계, 같은 직무로 일하는 아는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정말 고민될 것 같다면서,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추구하는게 무엇인지.
그러니까 지금 그 회사를 다니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언젠가 제 것을 해야해요. 그러려면 경험과 경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회사를 다니면서 여러 직무를 겪다보면 능력치가 쌓일거라 생각했어요. 나름 같은 분야에서 이름 있고 규모가 큰 회사라, 디자인 직무로 옮기면 배울 수 있는 건 진짜 많을것 같아요. 다만 이미 많이 지친 상태라 직무를 바꾼다 해도 괜찮을지 걱정이에요.
언니는 네가 경험을 쌓고자하는 거라면 악착같이 버텨야하는 거 아니냐는 조언을 해줬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니, 회사 자체가 정 힘들면 그만두는 것도 괜찮다는 말을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 팀 이동 제안에 혹할 정도로 이미 나는 그게 쉽게 뿌리칠만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직무를 옮겼을 때, 배울 수 있는 게 분명 많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고, 과연 이런 상황에서의 퇴사가 현명한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고민의 밤이 깊어간다.
[22/06/26 (일) 결국 결론은,]
나 퇴사해도 괜찮겠지?
친구와 얘기하면서 무의식중에 툭 나온 한마디였다. 약 이틀동안의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이 회사는 퇴사한다 라는 결론이 났던 것 같다.
친구는 내 얘길 듣더니 처음엔 직무를 옮겨서 거기서 일해보고, 그때도 아니다 싶으면 나오는게 어떻냐고, 그래야 미련도 후회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다가 후배가 해준 이야기를 전해줬더니 퇴사해서 내 길을 찾아나서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줬다.
최근에 후배를 만났을 때, 나에게 지금의 기회가 언니에게 찾아올 기회의 전부가 아니다, 나중에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이고 언니는 충분히 그걸 잡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해줬더랬다.
친구는 이 말에 동의해주면서,
맞아 너는 그런 사람이야. 너에게 찾아올 기회를 잘 잡을 것 같아. 라고 해줬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처음엔 직무를 바꾸는 방향으로 조언했다가 퇴사 쪽으로 돌려지고있다. 내가 퇴사를 하고싶어하니까 그 마음이 보여서 그런것 같았다.
[22/06/27 (월) 정들었던 사수님]
마음을 먹고 사직원 제출을 완료했다. 가지고 있어봤자 고민만 커질걸 알았기에, 그저 내 선택만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사수님이 연차라 우리팀이 텅텅 빈 느낌이었는데, 내가 가면 사수님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나한테는 사수님이 첫 사수였고, 사수님에게도 내가 첫 후임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나는 사수님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들. 그나마 내가 밑으로 들어와서 조금 나눌 수 있으셨을텐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니 혼자일 사수님이 조금은 마음이 쓰였다.
[22/06/28 (화) 마지막 월급]
마지막 월급이 들어왔다. 근로장려금까지 함께 들어온 날이라 통장이 반짝 두둑해졌다. 우선 수익이 생길때까지 최대한 아껴서 써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당장에 월 30씩 나가는 1년 만기 적금이 있고, 한국 무용 학원에 월 19만원이 나간다. 거기에 통신비 등의 고정지출까지 감당하려면 그 외의 돈을 최대한 아끼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내 자리에 있던 서류들을 일부 정리했다. 보관할 것과 이면지, 파쇄할 것으로 나눠서 내 흔적을 차근차근 지워갔다. 파쇄되는 종이들을 보고있자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나를 힘들게 했던 분들에게까지 나의 퇴사 소식이 전해졌는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자료 언제 넘겨줄 거냐고 하셨다. 인수인계받아서 하고 있던 업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예정이라 꼭 필요한 대화이긴 했는데, 그 전에 퇴사하는 직원에게 말 몇마디 덧붙여 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크게 바란 건 없었지만 그분들도 참 한결같았다.
덧붙여진 말은 있었다.
30일까지 일한다며? 그러면 내일까진 정리해서 보내줘.
그렇게 계속 있던 사람은 계속 있게 되나보다. 경력이 쌓여있으니, 나같이 퇴사하는 사람을 많이도 보셨을 것이다. 무뎌질만하다. 그래도 섭섭한건 어쩔 수 없다.
끝까지 잘 정리하고 나올 수 있길 바랄 뿐이다.
[22/06/29 (수) 사수님과 마지막 점심, 동갑들끼리 술 한잔]
오늘 사수님과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었다. 업무에 대한 솔직한 피드백을 원하셔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미 몇가지 알고 계셔서 추가로 더 말씀 드렸다.
생각했던 업무가 아니었고, 업무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그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특정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셔서 간단히만 말씀드렸고, 없던 포지션에 담당자로 뽑혀서 굉장히 부담감이 컸다고도 전달했다.
그렇다. 나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했지만, 뭔가열심히 한다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심적으로 안정돼서 아주 잠시 업무가 손에 잡히기도 했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잘 선택한 걸까, 후회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들이 또 다시 비집고 올라왔다. 그럴때마다 퇴사를 결정한 이유들을 하나씩 다시 곱씹었다. 그러면 퇴사를 결정하길 잘했다는 결론이 났다.
남은 하루, 실수 없이 잘 마무리하고 나오자고 다짐하는 밤이다.
퇴근후 동갑들끼리 한잔 하러 고기집에 갔다. 셋이서 별의 별 얘기를 다 털어놨는데, 하나같이 다 공감되는 것들 뿐이었다. 1년 반정도 다닌 그 친구들조차 변화가 없는 것들에 대한 한탄을 하고 있었고, 얘기를 들을수록 지금까지 버텨온게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얘기하다가 첫출근날 18년을 함께해온 강아지를 보냈다는 얘기도 했다. 그 마음을 이젠 제대로 추스리고 싶다고.
[22/06/30 (목) 퇴사 D-day]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출근길에 스타벅스에 들러 사수님께 드릴 텀블러를 샀다. 그리고 미리 챙겨둔 편지지에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내려갔다.
퇴사하는 이유 중에 '사람'은 제외라고.
좋은 기억만 고이 간직하려 한다고.
오늘은 모든 게 마지막이었다. 내일 행사에 참여해서 회사 분들을 또 만난다는 것 빼고는 내 자리, 내가 다뤘던 파일들, 점심시간 등등 모든 게 마무리 지어졌다.
같이 퇴사하는 다른팀 사원과 그 팀원 분들, 사수님과 함께 다같이 마지막 점심을 먹었다. 몇마디씩 나누다가 조용히 밥만 먹었던 것 같다.
퇴사하는 사람은 드릴 말씀이 없었고, 보내주는 사람은 덧붙일 말이 없었다.
모든 걸 이해한다는 침묵이었다.
날 힘들게 했던 그분들은 마지막까지 변함 없었다. 그 말투와 눈빛에 트라우마가 걸려서인지 마지막날인데도 좀 힘들었다.
하루 종일 업무 외 남는 시간은 지금까지의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 썼다. 사실 미리 해둔 게 많아서 건들 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책상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니 첫 출근할때의 책상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분이 묘했고, 이제 진짜 끝이구나 싶었다.
사수님께 아침에 샀던 선물과 편지도 드렸다. 왜 내가 자기에게 선물을 주냐면서 약간 울먹거리셨다. 너무 맘에 든다고 해주셔서 준비하길 잘했다 싶었다. 뭔가 선물이나 편지를 나눠야 진짜 마지막인 느낌이 날 것 같았다.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남아계신 직원 분들과 내일 뵙자는 인사를 나눴다. 사수님이 내가 오기 전 후임이 들어온다고 정말 행복해했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리고 모두들 ○○씨가 고민을 진짜 많이 했겠지, 하고 내 선택을 덤덤히 받아들여 주셨다.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짐을 챙겨 나왔다. 밖엔 한창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짐이라곤 자료가 넣어진 파일철과 칫솔세트, 업무용 달력과 삼색볼펜 한개가 전부였다. 그 가벼운 짐들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22/07/01 (금) 마지막 인사]
오늘, 참 길었던 하루였다. 회사의 경사에 퇴사하는 신입이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부담이었고, 다정하고 좋은 분들로부터 겨우 결심했던 마음이 흔들릴까봐 걱정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순간들은 즐거운대로 즐기려고 했다. 어쨌든 다 같이 있는 마지막 날이었고, 즐거운 날이었으니까.
그런데 대표님과의 술자리에서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대표님의 말씀에 바로 눈물이 흘러내렸던 걸 보면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눈물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대표님께서는 내가 회사에, 한복 브랜드에 정말 잘 맞는 사람인데 맞지 않은 어려운 직무와 책임을 주었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다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말이 너무 진심이셔서 속상한 마음에 터져버린 것 같다.
어딜 가서도 사랑받을 거야. 잘 하는 사람을 놓쳐서 아쉬워.
빈말이라도, 덕분에 지금까지의 힘들었던 일들이 살짝 미화될 수 있었다. 첫 직장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잘 선택했고, 잘 마무리 했다고 믿게 되었다.
대표님께서도 다른 직무로의 이동이나 현재 하고 있는 업무에서 일부를 제하는 방법이 있다며 한 번 붙잡아 주셨지만, 꿋꿋이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담긴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3개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좋은 기억만 갖고 가겠습니다.
그 인사를 끝으로 회사 생활이 공식 종료되었다.
사수님과 같이 집으로 가다가, 파리바게트에서 예쁜 케이크를 선물로 받았다. 나에게 줄 선물은 집에 두고 오셔서 택배로 보내주신다고도 하셨다. 그리고 사수님과는 언니 동생 사이로 나중에 사적으로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