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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아 Aug 24. 2023

여유

[인스타툰 스크립트]

2023/08/24 업로드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이었다.

(빈아가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다. 우산을 피는 빈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스터디 카페 쿠폰이 생긴 김에 그곳으로 가 작업을 하기로 했다.

(횡단보도에 서 있는 빈아. 버스가 지나가는 걸 발견한다.)


타야 할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약 10분.

(급히 달려가 손을 뻗어 보지만 이미 버스는 저 멀리 가고 있다. 전광판에 다음 버스가 오기까지 10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쓰여 있다.)


다른 버스를 탈 수도 있었지만 중간에 한번 갈아타야 했고 걸어가기엔 가다가 옷이 다 젖을 게 분명했다.

(핸드폰을 바라보며 다른 경로를 찾아보는 빈아.)


기다리자, 하고 서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체념한 듯 한숨을 쉬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 빈아.)


그 순간 하늘을 바라봤는데,

(하늘을 바라보고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빈아. 얼굴 클로즈업.)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하늘'이라는 존재가 낯설게 다가왔다.

(흐린 하늘. 비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구름의 흐름이 희미하게 보였고 비냄새도 맡아졌다. 귀에 들리는 음악 소리는 감미로웠다.

(오감을 느끼며 그 순간의 여유를 즐기는 빈아.)


나에게 선물처럼 여유가 찾아왔구나.

(손을 뻗어 부슬비를 맞는 빈아.)


 하늘을 바라보는 게 의무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에게 하늘은 그날그날 꼭 봐야만 할 것 같은 존재다. 보지 않은 날엔 그 정도로 삶을 느끼고 있지 못하는 건가 싶어 스스로가 안쓰럽게 느껴진다. 지금 시각 저녁 7시 41분. 오늘하늘을 본 시간이다. 많이 늦었다.


 여유를 찾아도 되는 날임에도 그 방법을 잊어버려 시간에 휩쓸려가 버린 날.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스터디 카페 쿠폰이 생겨 그곳으로 가 작업을 하기로 하고 집을 나서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시원하게 확 쏟아질 것이지 왜 이렇게 내려, 하는 비였다. 우산을 펴고 언덕길을 내려가 중앙 차선의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 순간 눈앞으로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갔고, 그와 동시에 초록불이 켜졌다. 버스 정류장이 꽤 길어서 맨 앞에 정차한 버스를 타기 위해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야 했다. 그러나 부슬부슬 내리는 비에 벌써부터 바지가 젖고 있었고 내 다리는 그냥 이유 없이 무거웠다. 그렇게 타야 할 버스를 놓쳤다.


 다음 버스는 10분 뒤 도착이었다. 다른 버스를 타자니 갈아타거나 크게 돌아가야 했고 걸어가기엔 부슬비와 30분 정도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조급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는데 괜히 버스를 놓쳐 조급해진 마음을 다잡고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날의 첫 곡은 감미롭고 서정적인 것으로 골랐다. 신나는 노래를 들어봤자 침침한 눈이 트일 리 없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하늘로 시선이 향했다. 흐린 하늘에 밝은 회색의 구름이 크게 흘러가고 있었고 버스 정류장의 지붕으로 비가 툭툭 떨어지는 게 보였다. 얼마 만에 보는 하늘인지 가늠이 안 갈 정도로 '하늘'이라는 존재가 낯설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거기에 시원한 비냄새와 감미로운 음악소리까지, 오감이 동시에 작동하며 나는 그 현재에 온전히 있었다.


 내가 놓친 버스가 준 선물이었을까. 빨간불이었던 신호등까지 뛰고 있는 나를 보며 여유를 가지라는 신호를 주고 싶었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날 바라본 하늘은 옷을 젖게 하는 부슬비마저 순식간에 아름답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걸 놓치고 있었던 것인가. 오히려 놓쳐도 되는 것들에 사로잡혀 몸만 이동시키고 있었던 것인가. 평온해도 됐는데. 그래도 괜찮은데.


 그날 이후 나는 여전히 수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떤 의무감도 남아있지 않다.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되는 날은 앞으로도 몇 없을 테니 그 순간들을 가만히 기다리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또다시 그때가 오면 기쁘게 맞이하며 다시금 여유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찾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디 갔는지 모를 '여유'를 또 단숨에 발견하는 날이 점점 많아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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