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글

2023/08/02_밤 11시 19분

by 빈아

오늘 고등학교 친구들과 센터(청소년 시절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던 문화의 집)에 갔다. 여전히 아이들 소리에 시끌벅적했던 그곳. 그리고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던 애벌레(그곳에선 이름과 직급이 아닌 별명으로 부른다).


반갑다고 수다를 몇 시간 동안 떨었지만, 나의 근황을 묻지 않으셨던 애벌레였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순간순간들이 떠오르는 밤이다. 애벌레는 나를 취준생으로 알고 계셨는데, 그래서 섣불리 안부를 묻지 않으셨던 것 같지만, 나는 사실 물어보시면 답해드려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작가 생활이 크게 숨길만한 일도 아닌 게, 나는 정말 취업 생각이 없어졌고 지금의 생활에 너무 만족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와 병행하기 힘들긴 해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런데 나는 왜 먼저 말씀드리지 않았을까. 안 좋게 보실까 지레 겁먹었나. 애벌레가 내겐 편한 어른이 아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더 크면, 꼭 말씀드려야지. 여전히 그곳, 그 자리에 계신다면 깊은 대화를 한번 나눠봐야지.


애벌레와 근황 토크 겸 식사를 마치고 센터가 곧 10주년이라 부탁받은 축하 영상을 남기고 왔는데 우리,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아이들이라 대본까지 쓰고 영상도 계속 재촬영하며 겨우 끝내고 나왔다.


화면 속의 내 모습이란, 정말 낯설었다. 빨리 교정이 끝났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내가 눈을 또렷하게 뜨지 않고 말하는구나, 자세가 좋지 않구나, 확실히 피곤해서 목소리가 낮네, 등등 어색하고 부끄러운 부분들만 보였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대본을 단숨에 쓰면서 확실히 '글'이 나에게 점점 스며가고 있음을 느꼈고, 김칫국일 수도 있지만 글 쓰는 게 재능이 되어가고 있음에 감사했다. 생각난 김에 영상 한 번 더 보고 자야지.


매일 글을 쓰다 보니 펜이 빨리 단다. (괜히 뿌듯하다.) 0.38mm로 쓰다가 0.5mm로 쓰는데, 선명하니 더 꽉 차 보이고 좋은 것 같다. 이토록 선명한 글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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