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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Jul 17. 2023

찰나의 행복

<아이스크림>

 일 년 열두 달 중에는 날짜가 더 많은 달들이 있다. 어릴 때에는 어느 달에 날짜가 더 많은지 매번 헷갈렸는데, 주먹 달력법을 배우면서 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주먹을 살짝 쥐면 뼈가 튀어나와 있는 부분과 움푹 들어가 있는 부분이 보인다. 왼쪽 새끼손가락 끝부터 튀어나온 부분을 1월로 놓고 1월은 31일, 움푹 들어간 부분을 그다음 월로 놓고 30일인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오른쪽 손까지 쭉 세기만 하면 31일인 달을 금세 구별해 낼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이번 달이 31인지 아닌지 아는 것이 중요했던 까닭은 모 기업의 아이스크림 할인 정책 때문이었다. 두 달 쯤마다 한 번씩 있는 31일에는 오빠 동생과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커다래진 통을 눈앞에 두고 쇼케이스를 몇 번이고 왕복해 가며 어떤 맛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던 시간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다.


 집 냉동실에 막대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얼음틀이 생기고부터는 온갖 종류의 주스를 부어 하드를 만들어 먹었다. 얼었나, 안 얼었나, 냉동실 문을 여닫으며 오매불망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면 감쪽같이 완성되어 반짝이는 하드. 뽑아내다 뚝 부러지기 일쑤인데다 기다림의 시간에 비해 먹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녹기 전에 쭉쭉 빨아먹고 아쉬운 마음에 플라스틱 막대를 씹다 혼도 났다. 평범했던 주스가 냉동실 안에서 차가워져 얼음이 된 것뿐인데, 이상하리만치 귀하고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이를 먹고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사놓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자 나는 주기적으로 아이스크림 할인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상큼한 하드 계열부터 크림, 통, 콘, 빙수, 몇십 년이고 꾸준히 나오는 클래식한 이름부터 지난주에 새로 나왔다는 맛까지 바구니를 가득 채워서 집으로 달려왔다. 녹을까 후다닥 냉동실에 채워 넣으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착착 쌓인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반짝거리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뿌듯한 마음이 됐다. 맵거나 짠 식사를 마친 다음에 대충 하나 골라 입에 물고 늘어져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먹은 법은 이렇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개 뜯어 예쁜 그릇에 올리고 후추와 소금을 갈아 올린다. 거기에 민트 잎을 올려 향을 입히면, 단순한 듯 보이지만 달고 짜고 향긋하고 상쾌한 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호화스러운 아이스크림이 된다. 끊임없이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냉장고에서 꺼내진 순간부터 점점 아이스크림이 아니게 된다. 많은 것들이 그렇듯 기다림과 설렘의 시간은 길고, 행복한 순간은 찰나다.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사치스럽고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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