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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Sep 05. 2018

오래 잔다면 차라리 꿈이라도 꾸도록

 고등학교 때 나의 친구들은 나를 신생아라고 불렀다. 별명으로 쓰기에 정말 이상한 이 단어는 내가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잠을 자는 데 썼기 때문이었다. 키는 안 크면서 자꾸 잠이 와서, 쉬는 시간이고 수업 시간이고 스르르 감기는 눈에 불가항력으로 잠이 들곤 했다. 점심시간에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밥을 먹으러 갔다. 야자 시간에는 선생님께 크게 혼나고 혼이 나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엉엉 울기도 했다. 저는 정말 자고 싶어서 자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저도 정말 안 자고 싶은데, 잠이 자꾸 온다고요. 지금 선생님을 하고 계신 엄마가 아신다면 기함을 하실 테지만 그때는 그랬다.


 대학에 와서는 며칠 동안 늘어져 잠을 자기도, 또 며칠간은 거의 잠을 자지 않기도 했다. 5년 동안 여러 번의 며칠들을 지나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은 어느 쪽이 더 즐거우냐에 따라 잠의 길이와 그 밀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교 때의 나는 공부에 생체적 거부반응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게 많은 시기에는 잠을 줄이지 않아도 잠이 줄어들었다. 오늘 밤에는 이걸 하고 싶고 내일 아침엔 저걸 하러 가야지, 눈을 뜨고 있을 때 할 일들이 많은 시기에는 잠을 짧고 굵게 잤다. 꿈도 꾸지 않았다. 잠들었다 깨면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현실 속에서 움직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반면 잠이 많은 시기에는 일어나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눈을 끔뻑 뜨고도 그대로 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다 다시 슬그머니 잠이 들었다. 그런 잠 속에서 나는 영화를 보듯 많은 꿈을 꾸었다.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크고 푸른 해일이 일어나고, 물속에서 숨을 쉬었다. 즐거운 순간에 깨면 잠시 멍해 있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현실보다 꿈을 꾸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꿈을 꾸는 날이면 충분히 많이 잤구나 생각한다. 주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날 잠이 길어지기에, 꿈까지 꾸지 않고 오래 잔 날에는 꽤 우울해진다. 꿈꾸지 않는 잠은 정말로 필요한 만큼만, 오래 잔다면 차라리 꿈이라도 꾸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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