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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에서 분리되고 또 보호받았다

달리기

by 빈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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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춤을 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춤을 배워 본 적이라고는 초등학교 학예회 때 부채춤, 한 달 다녔던 동네 방송댄스 학원이 전부이지만, 아무도 없는 논이나 산 중턱, 들판, 절벽 위, 바닷가에 혼자가 되면 혹시 누가 있을까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팔다리를 멋대로 흐느적거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남이 보면 영락없이 정신나간 사람이다. 그러나 온 관절을 있는 힘껏 펼치고 접는 동작은, 늘 내가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사람임을 말해줬다. 너는 다섯 발자국에 이마가 벽에 닿는 파피용이 아니라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서울에서는 사람이 없는 너른 땅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방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아무렇게나 춤을 춘다. 그러다 문득 이걸로는 부족해! 라는 기분이 들면 운동화를 끼워신고 밖으로 나간다.

성수에 살 때에는 한강으로 나갔다. 시장과 한적한 주택가를 지나쳐 십오 분 쯤 걷다 보면 저멀리 작은 터널이 보였다. 우리는 그걸 토끼굴이라고 불렀다. 토끼굴 입구에 서면 늘 조금 긴장했다. 건너편에서 물빛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 너머는 다른 세상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정신없이 빠져버리고 싶지 않아서, 반대 편 구멍에서 눈을 떼지 않고 찬찬히 걸었다. 내가 구멍 속 세상으로 다가가는 것인지 그가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점은 점점 커져서 나의 세상이 되었다.

퐁 하고 구멍을 완전히 빠져나오면 세상의 부피가 갑자기 늘어나 크게 숨을 쉬어야 했다. 공기의 온도와 습도, 밤이 시작되기 직전 하늘은 아직 보라빛이고, 한강물은 출렁출렁 흐르고, 사람들은 걷거나 뛰거나 앉아 있고, 나는 잠깐 스트레칭을 한 뒤 달리기를 시작한다. 한강에서는 내가 달리는 만큼은 늘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달린다. 그렇게 한강을 따라 달리기를 하고 있으면 춤을 추는 기분이 들었다. 그 누가 보아도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은 춤. 숨을 거칠게 몰아쉬어도, 팔다리를 쭉 뻗어도, 벌개진 얼굴을 적시며 땀을 흘려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달리는 행위로 인해 나는 세계에서 분리되고 또 보호받았다.

지금은 토끼굴이 집에서 너무 멀어진 바람에 가까운 지하 굴로 간다. 누군가의 땀 냄새가 나는 옷으로 갈아입고 작은 사물함에 처박아놓던 운동화로 갈아신는다. 빨간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제자리를 뛰니 숨이 차오르지만, 답답하다. 옆 사람과 너무 가깝다. 나의 절박한 숨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너무 크게 들릴 것 같아 무섭다. 손발을 끝까지 펼칠 수 없는 곳, 아무리 빨리 뛰어도 바람이 스쳐지나가지 않는 곳. 나는 눈앞에 붙어있는 러닝머신 조작 설명서를 읽고 또 읽다가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2

달린다. 폐포가 들이마신 공기와 촘촘히 닿지만 그것이 턱없이 모자라 나는 내가 어떻게 숨쉬는지에만 집중한다. 땀이 나기 시작하고, 또렷하던 시야에 힘이 풀리고, 두 다리는 멈추지 않고 번갈아 교차하며 발을 땅에 딛는다. 네 번에 나누어 들이쉬던 숨은 이제 두 번만에 가득 찬다. 발이 아픈 것 같아, 괴로워, 히끅거리며 숨을 폐 끝 깊숙히 집어넣는다. 한 번 더, 또, 그리고 어느 순간 늘어난 만큼의 공기는 당연해진다. 늘어난 만큼의 공기도 벅차면 점점 더 깊이 숨을 집어넣고, 또 당연해지고, 그렇게 폐가 점점 커다래지는 기분으로 달린다.

행복도 마찬가지일까, 순간에 느낄 수 있는 행복함의 총량이 있다면, 반복해서 행복할수록 나는 점점 더 큰 행복을 느끼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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