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상기된 얼굴을 한 아이들 사이에서 쪼그려 앉아 신발끈을 바짝 조였다. 누군가는 이러한 흥분된 긴장감이 즐겁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난 언제나 눈을 질끈 감고 얼른 시간이 지나가 버리길 바라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신발끈은 발을 최대한 조이게 묶는 것이 중요했다. 평소엔 슬리퍼처럼 운동화를 질질 끌며 다녔지만, 달리기 할 때만은 달랐다. 신발의 앞코부터 차례차례 정성 들여 구멍마다 힘을 꽉 줘 신발을 끈을 당겨 맸다. 옆에선 신발을 아예 벗어버리고 양말만 신고 달릴 준비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어 달리기는 운동회의 꽃 같은 행사였다.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하고 목이 쉬어라 응원하는 단 한 번의 승부.
호루라기가 울리며, 우리 반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 차례. 이제 심장이 쿵쾅거리는 진동이 가만히 있어도 느껴진다. 달리기도 전인데 숨이 차오르는 것 같다. 긴장으로 인한 실제 신체 현상이었을 수도, 떨리는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었을 수도.
바람에 날리는 모래바닥 사이로 흰색 분필가루로 그은 선 사이에 섰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조금 더 사용하기 편한 오른발을 뒤에, 내 몸을 받쳐줄 지지대로 왼발을 썼다. 넘어가선 안 되는 선에 바짝 왼쪽 운동화의 앞코를 가져다 댔다. 발을 디딘 그곳을 발바닥으로 지져 밟는다. 조금이라도 더 마찰력을 늘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빤히 바라봤다. 모래 알갱이 알갱이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보인다.
다시 짧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준비. 바닥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본다. 올림픽에서처럼 발을 기댈만한 멋진 장비 없이, 재빨리 뛰쳐나가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상체를 최대한 낮춘다. 움찔, 움찔. 눈은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작 내 귀는 옆에서 손을 높이 쳐들고 있는 선생님의 손에 가 있다. 뛰쳐나갈 준비를 하며 '탕' 소리를 기다린다. 고만고만한 달리기 실력을 가진 아이들 사이에선 스타트가 생명이다.
탕!
단 몇 초만에 승부가 결정 나 버리는 단거리에선 상대방이 어떻게 달리는지, 나는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을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중거리에서라면 다르다. 어느 해 여름,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400m 중거리를 뛰었다.
똑같이 '탕' 소리와 함께 시작하지만, 누구도 시작 지점에서 힘을 빼지 않는다. 출발 선상에서 몸을 낮추고 재빠른 스타트를 준비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숨을 쉰다. 후, 하. 후, 하. 들숨과 날숨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며 몸에 힘을 풀고, 긴장을 털어 낸다.
출발 신호와 함께 시작되는 긴박한 드라마는 없다. 모두가 천천히 조깅을 하듯 달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괜한 조바심과 초조함을 버리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선두에서 달릴 순 없다. 가장 좋은 자리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아껴 놓은 힘은 400m의 마지막 바퀴를 뛸 때 다 쏟을 것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달린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근육은 쉽게 피로해진다. 끝까지 최대한 아껴두는 것이 중거리 달리기에서 가지는 나의 유일한 전략이다. 그리고 마지막 바퀴가 시작되는 라인부터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이제까진 선두를 따라잡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붙었다면, 이제 코너에서 멀리 돌아서라도 선두를 따라잡아야만 한다.
마지막 바퀴의 반절이 넘어가며 허벅지는 타들어가고, 종아리는 바짝 당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이제부턴 호흡을 멈추고 남겨뒀던 힘을 쏟아 달린다. 팔을 세차게 흔들고, 발목에 힘을 꽉 주면서. 나의 400m 달리기는 대부분은 실패였고, 때때로는 성공이었다. 언제나 같은 전략으로 임했지만, 왜 나는 때에 따라 잘 달리기도 했고, 못 달리기도 했을까. 아직도 모를 일이다.
목표는 항상 거창하지 않다. 목표는 멈추지 않는 것. 느려지더라도, 끝내 멈추지 말고 끝까지 달리자고 출발선 뒤에서 다짐한다.
트랙을 도는데, 내가 몇 바퀴 째인지 세 바퀴가 넘어갈 즈음부터 잊곤 했다. 출발선 근처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입모양으로 몇 바퀴가 남았는지 알려줄 때마다 '그렇구나' 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점은 없다. 느린 속도로, 숨 쉬는 데에만 집중한다. 후우, 하아. 후우, 하아.
점점 차오르는 숨과 타들어가는 허벅지가 힘에 부쳐,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속도가 될 때도 있었다. 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빠른 걸음보다 느린 것 같은 기분에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마음만 굴뚝같고,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 오래 달리기는 으레 그렇듯 나의 어쩔 수 없는 느림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1km의 달리기는 결국 10분도 되지 않아서 끝이 난다.
인생이 달리기라면 하루하루는 단거리 달리기처럼 급박하고 극적일 때가 있을 테지만 결국 길게 보면 오래 달리기와 닮은 점이 많다. 내가 달리는 속도가 걷는 것만 못하게 느껴지고, 이룬 것은 없는데 시간만 야속히 흘러가고 있다는 초조함이 어디에선가 날 강타하곤 하니까.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는 것. 한 방향으로 느리더라도 조금씩 나아갈 것.
*위 사진들은 2010년과 2011년도 사이 언젠가 노숀이 찍어 준 나의 모습.
보통은 인스타그램에서도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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