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
한 학기에 두어 번은 과제를 낸다거나 면담 차례가 된다거나 하는 이유로 교수님 연구실 문을 두드릴 날이 있었다. 유난히 조용한 오후의 공기를 머금은 복도에는 갈색 페인트로 칠한 쇠문이 줄줄이 서 있었고, 갓 프린트한 과제 뭉치나 음료수 캔을 들고 있던 나는 몇몇 이름들을 더듬어 문 앞에 섰다. 무겁고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처럼 생긴 문에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재실/회의/출장/휴가/부재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누군가 검지 손가락으로 밀어 놓았을 까만 화살표를 쳐다보았다. 부재. 차가운 문에 귀를 살짝 대고 문 안쪽의 기척을 느끼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결국 작게 두 번 두드렸다. 방 안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몇 년 전 부재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게 ‘기타 사유’라는 뜻인 줄 알았다. 회의나 출장, 휴가(-로 인해 자리에 없습니다-)와 다르게 그냥 이유를 설명하기 복잡한 일(-이 있어서 자리에 없습니다-). 누군가 부재중의 표현을 하면, 나는 그저 상대가 부재중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래서인지 시간이 흘러 그 단어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도 '부재중'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딘가 불편하고 일방적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하게 당황스러운 부재를 맞닥뜨린다. 퇴근길 맥주를 사서 들어갈 생각에 한껏 들떠 있는데 편의점 직원이 화장실에 가서 문이 잠겨 있다거나,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식당이 하필 '개인 사정으로 오늘만 휴업합니다'라거나, 당연하게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누군가가 자리를 비운 경우들이다.
누군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면 그의 부재는 그만큼 당혹스럽다. 나는 때때로 가까운 이들의 부재를 상상한다.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면. 나의 삶에서 그들이 송두리째 뽑혀 나간다면 그곳에 생길 구멍을 남아 있는 기억만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안부를 묻고, 좋아한다 말하거나 말없이 품에 안긴다. 시간이 지나면 남길 수 없는 것들을 만끽해야 하기에.
일이 생겨 하루 이틀 집을 비우는 날이면 엄마는 항상 밑반찬 너덧 가지의 위치, 쌀을 씻어 안치는 법과 가스 잠그는 법을 여러 번에 걸쳐 단단히 일러주었다. 엄마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몇 장의 지폐를 현관 앞에 놓고 나가면 나와 오빠, 동생 셋은 조르르 베란다 창문에 달려가 붙어 엄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엄마가 없어도 우리의 일정은 순조로웠다. 몇 시간이고 실컷 메이플 스토리를 하고, 티브이를 보고 낮잠을 잤다. 가스랑 문도 잘 걸어 잠갔겠다, 보일러 온도도 적당하겠다, 숙제도 뭐.. 이따 하면 될 것 같고, 싸우지도 않았고. 이제 우리도 다 컸네.
배가 고파질 때쯤 오빠를 선두로 일단 외식을 하기로 했다. 어른은 돈을 써야지. 만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집 앞 김밥천국에 갔다. 일반 김밥 세 줄과 참치김밥 두 줄을 무사히 사 온 것에 하이파이브를 날리며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엄마가 냉장고에 넣어 놓은 밑반찬들을 꺼내며 분주히 움직이는데, 뭔가 이상해서 들여다본 전자레인지 안은 과학 시간에 본 플라스마 볼처럼 전기가 통하는 게 보이고, 우리는 당황해서 황급히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은박 포일은 군데군데 꺼멓게 구멍이 나 있고, 까만 연기와 이상한 냄새에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엄마, 엄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