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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 덩어리

<사진>

by 빈부분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 년 중 가장 행복한 이틀은 아마 방학식이었을 거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그 날이 오면 동동 뜬 공기가 책상과 의자 밑에 가득 찼고, 담임 선생님은 줄줄이 앉은 책상의 맨 앞자리 친구에게 방학 때 해야 할 목록이 빼곡하게 인쇄된 갱지 뭉치를 나눠 주었다. 종이접기, 수학 문제집 풀기, 곤충 채집하기, 부모님께 효도하고 싸인 받아오기 등등.. 지독한 게으름뱅이(이자 그때도 INFP였을 것이) 었던 나는 책가방에 그 목록을 처박아두고 방학 내내 펑펑 놀다, 개학이 삼일 남은 시점에 부랴부랴 숙제들을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는 단연 일기였다.

해 떠 있는 시간에는 아파트 화단에서 비비탄 총알을 주웠으며 주차장에서 아기 사방, 얼음땡 및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를 했고, 노을이 지고 다리가 저릿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서는 기절하듯 잠을 잤다. 일기를 쓸 수 있는 날은 보통 재미없는 날이었다. 비가 와서 하루 종일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오랜 낮잠을 잔 날.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 않은 날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쓸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일기는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루다 쓰는 진짜 마지막 방학 숙제였고, 당시 인터넷을 잘 활용하지 못했던 나는, 날씨를 꾸역꾸역 기억해내야 하는 게 제일 고역이었다.

세상에는 매일의 일들을 기억하고 정리해서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중 일어나는 사건들을 점찍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사진은 일기를 후다닥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도구다. 뷰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내가 선택한 장면들을 언제고 꺼내어볼 수 있도록 기록하는 일. 요즘(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오래되었지만)에는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찍을 수 있는 사진들이 작업을 하는 데에 꽤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날씨를 기억할 때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사진을 찍는 것의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면 뷰파인더 안쪽이 아닌 바깥쪽의 세상이 함께 보인다는 거다. 소리, 온도나 기분, 정지한 사진 앞뒤로 흘러가던 시간이 함께 떠오르기에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하나의 시간과 공간 덩어리를 기록하는 셈이 된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아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뷰파인더 바깥으로 보이는, 사진 찍는 사람이 쉬는 숨과 그 망막의 바깥쪽을 상상한다. 특정한 빛의 온도와 그 빛을 받는 대상, 그와 사진가의 관계 같은 것들. 때때로 사진 밖의 것들이 더 즐겁다.

사진을 찍다 보면, 글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롤랑 바르트가 기록한 일상의 이야기를 모은 책 <소소한 사건들>을 읽다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사소하고 웃기고 슬프고 당당하고 귀엽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 글로 볼 수 있는 장면들이 그렇고, 사진으로 써내려가는 글들이 그렇다.

종종 어린 나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었더라면 어떤 장면들을 남겼을지 생각한다. 아마 나무 위에 올라가, 창문 너머로 손을 뻗어, 풀숲 사이, 문틀을 타고 올라가 가까워진 천장 벽지를, 널을 뛰다가, 마루 밑을, 옷장 속 어둠을 담았을 것이다. 뭐가 됐든 지금은 볼 수 없는 장면들이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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