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름은 겨울보다 조금 더 지긋지긋한 구석이 있다. 더위를 견디고, 머리 위로 흐르는 땀방울과 공기 중의 습기와 싸워야 하는 여름은 9월 말, 10월 초까지도 갈듯 말 듯 애를 태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다가도 또 따가운 햇볕에 얼른 에어컨 아래로 도망쳐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올해의 여름은 지난여름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울 정도의 지긋지긋함을 보여줬다. 모두 알다시피 올여름엔 비가 왔다. 비가 온 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장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여름 내내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비 냄새가 났다. 저녁에 잠들 때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들었다. 신발을 신고 집 밖으로 나갈 때면 마스크와 함께 우산을 챙겼다. 우산이 필요하지 않았던 날을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늘은 매일매일 회색빛이었다. 일기예보엔 오류가 난 것처럼 모두 비구름으로 가득했다.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름이 아니라 우기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단 며칠 만에 거짓말처럼 가을이 왔다. 가을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을 아침 창밖을 보며 며칠간 계속해서 놀라고 있다. 하늘이 이렇게 푸를 수 있다니. 바람이 이렇게 건조할 수 있다니. 깜짝 놀라서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 어떤 아침도 있었다. 얘들아, 바깥을 봐봐. 날씨가 너무 좋아! 이상해! 신기해!
점심을 먹고, 서울숲을 한 바퀴씩 산책한다. 꽤 많은 사람이 날씨에 이끌려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서로 거리를 두고 있지만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다. 아, 사람들이 날씨가 좋아서 다 행복해하고 있네. 비만 안 와도 이렇게 다들 좋아하고 있어. 어깨선 어딘가에서, 그들의 고갯짓 어딘가에서 신난 기분이 흘러나온다.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공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돗자리를 펴고 잠시 잔디밭에 다리를 뻗고 앉는다.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것이 분명한 반려견들도 이리저리 냄새를 맡으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고양이들도 산책을 나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무서워하려나?
모두가 행복한 서울숲도, 사실은 여기저기에 펜스가 처져 있다. 서울숲 곳곳에 설치된 운동기구들을 더 이상은 사용할 수 없고, 스케이트보드장과 배드민턴 코트도 빨간 테이프가 쳐졌다. 서울숲에서 즐길 수 있던 많은 활동들을 더 이상은 즐길 수 없고, 겨우 산책만이 가능하다. 코로나가 끝나면, 닭발 걸고 배드민턴 내기를 하기로 했다. 하지 말라고 하니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애써 참고 있다.
매 가을, 나는 억새를 찍으러 출사를 나가곤 했는데 그것조차 이번 해에는 건너뛰게 됐다. 글을 쓰는 오늘은 하늘공원도 폐쇄한다는 포스팅을 읽었다. 아무래도 올해 가을은 많이 걷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서울숲을, 한강을 더 많이 그리고 자주 걸어야지. 걷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