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9월은 달리기 참 좋은 계절이다. 해가 지면 건조하고 서늘해져 끈적임을 가를 필요도 없고, 칼바람에 콧구멍 속이 아프지도 않다. 집에서 출발해 천천히 달려 조금씩 땀이 나기 시작하면 그럴듯한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지는 않지만 경사가 있어 숨이 찬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금방이라도 돌진할 것 같은 포즈의 강감찬 장군 동상이 서 있다. 그를 중심에 놓고 공원의 가장자리를 돌아 뛰다 보면 땀이 흐르기 시작하지만, 차갑고 기분 좋은 바람에 금세 식어 언제까지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표한 만큼 뜀박질을 하고 나면 천천히 걸으며 땀을 말린다. 뛸 때에는 몰랐던 가을의 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을밤의 공원을 걷는 사람들은 어딘가 여유롭다. 얇은 긴 팔 겉옷을 걸치고 삼삼오오 나의 곁을 지나치며 아니 그런데 내가 좀 그런 면이 있잖어, 나도 아는데,, / 야 걔가 그랬다니까? / 음~ 그러면 좀 마시는 거 허락할 수 있지. / 여기 하나도 안 깜깜해 가로등도 다 있는데 뭘, / 64년도에 태어난 사람들은~ / 등의 작은 문장들을 한 마디씩 흘리고 지나간다. 나는 마음대로 다음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마찬가지로 천천히 걷는다. 여름과는 달리 점잖게 우는 풀벌레 소리와 나지막하게 조곤대는 말소리들을 주워듣고 있자면, 늘 그랬듯 다음 계절이 다가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가을은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도 지치지 않는 계절이기에, 사람들은 느린 속도로 걸으며 서로의 이야기에 더 귀를 잘 기울인다. 얼른 들어가자고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있다 가자 말한다. 너의 이야기가 자리를 채우면 나의 이야기를 양보한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장판을 데우지 않아도 몸이 쾌적함을 느낄 수 있으니 생기는 여유다. 어쩌면 그렇게 몸이 편안할 수 있는 공기의 온도와 습도만으로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뭉근한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가을이 이렇게 여유롭게 느껴지는 건 음식 때문이기도 하다. 팔순이 넘으셨지만 아직 농사를 짓는 할머니 댁에 가면 올해 수확한 쌀로 떡을 지어먹는다. 앞마당에는 말랑한 감이 떨어지고 뒷마당에는 곶감을 줄줄이 달아 놓는다. 밤을 털고 밭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에서 사과를 딴다. 지금은 추석 때 들어오는 선물만큼 나간 선물도 있겠거니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이런저런 과일, 반찬, 주전부리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런 종류의 여유도 가을에야 느낄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올해는 집 나간 누구도 돌아온다는 가을 전어를 처음 먹어 봤다. 구운 전어는 기름지고 고소해 한 입 베어 무니 입맛이 팽 돌았다. 열심히 먹고 한 잔 하고 가을의 밤을 천천히 걸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 여유를 가을 공기처럼 누구나 누릴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