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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돌아오고 싶은 곳

<추석>

by 빈부분

요즘엔 많이들 사 먹는다고 하지만, 추석이 되면 우리 집은 콩송편을 빚어 먹는다. 할머니는 미리 검정콩을 한 솥 넘치게 쪄 놓고, 우리가 시골에 도착하면 방앗간에서 빻아 온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조금씩 부어 가며 익반죽을 한다. 주방의 지휘자인 엄마나 할머니의 컨디션에 따라 반죽 상태가 결정되는데, 미미한 차이로 질거나 된 반죽이 만들어지기에 그들은 늘 긴장하며 물의 양을 맞추곤 한다. 팔 힘이 좋은 사람들이 여러 번 치대 쫀득해진 반죽 덩어리를 대야에 담아 놓으면 모두가 둥그렇게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각자의 손 크기에 맞게, 좋아하는 모양과 두께를 정해 동글동글 반죽을 굴린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무슨 일을 새로 시작했는지, 이따 저녁엔 뭘 해 먹기로 했는지 같은 이야기로 송편 속을 채워 꼭꼭 여민다. 간간이 맞장구를 치며 빚은 송편을 찜기에 얹고 있자면 세상에 이렇게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랍다.


찐 콩을 넣어 만든 송편/ 할머니는 찜기를 잘 샀다며 뿌듯해하신다


올 추석에는 송편을 빚기 전에 송이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작은 산을 올라갔다. 여기서 송을 잠시 소개하자면, 송은 아빠의 첫째 여동생이 낳은 첫째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송씨여서 송씨가 되었다. 송은 사촌 또래 중 나이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90년대와 00년대에 팔다리가 길어지던 우리들을 이끌고 산과 들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그의 담대함과 민첩함 덕에 송과 함께 있으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커다란 개를 산책시키고 멱을 감고 동네의 빈 병을 주워 슈퍼에 팔고 한밤중 분수 폭죽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린 날의 모습 그대로 유쾌하고 따뜻하게 나이를 먹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논 사이를 지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몇 분쯤 오르자 저 멀리 능선이 켜켜이 쌓여 하늘과 맞닿은 산들이 나타났다. 그냥 뒷산이나 좀 다녀오자던 그였기에 우리는 상상하지 못했던 장면을 마주하고 연신 감탄하며 흔들리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송은 그 근처에서 머리통 크기만 한 노루궁뎅이버섯과 으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얼마쯤 더 올라갔을까, 산비탈 아래 편백나무를 조밀하게 심어 만든 장벽이 나타났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비탈을 내려가 편백나무 사이를 조금 걸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삼십 명이 무등을 타도 꼭대기에는 닿지 못할 듯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작은 정자 아래에서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치는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다 말다 했다. 그곳에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당연하게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있었고 그건 어린 날의 우리들이 함께 보낸 시간 덕이라는 걸 우린 알았다.



나에게 추석은 많은 가족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귀한 날이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과는 잠시 어색한 공기가 서릴 때도 있지만 이내곧 각자가 겪은 마음들을 터놓으며 울고 웃는다.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들으며 당시의 그들의 모습을 상상한다. 농부이자 마을의 이장이었고 학교의 이런저런 일들을 도맡아 하던 사람, 여섯 식구의 몸 뉘일 집의 마루를 깔고 시멘트를 바르던 사람, 서울 어딘가에서, 광산에서 몸이 부서지게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마음속에 살아 움직인다.

이번 추석에도 그들을 만나러 간 것은 순전히 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마주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내가 돌아간 곳처럼,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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