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고백하자면 나는 명절 음식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설날의 떡국도, 추석의 송편도 의무감에 먹기야 하지만 평소에 찾아 먹는 법은 없다. 전을 부치고, 잡채의 간을 볼 때 입에 몇 점 넣으며 준비를 돕다 다 같이 모여 식사할 때가 되면 난 이미 배고픔이 가신 뒤다. 입이 짧아서 그렇다. 그러니 명절을 기다린 적도 없다. 나에게 명절은 가족들을 오랜만에 만난다는 의미보다, 엄마가 온 가족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시간들에 가까웠다.
그런데 올해 추석엔 송편이 없었다. 갈비찜도, 전도, 생선도, 잡채도 없었다. 곶감과 사과와 배도 없었다. 올 추석에 친할아버지는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지 않으셨고, 서울에 사는 가족들도 내려가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시끌벅적 짐을 바리바리 챙기던 여느 때의 추석과는 다르게 평소처럼 눈을 떴고 엄마, 아빠와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떡볶이였다.
전날에 이미 메뉴는 정해두었다. 아빠가 떡볶이를 만들기로 했다. 이미 몇 차례 내가 없던 주말에 실력 발휘를 했던 모양이다. 떡볶이에 라면 사리도 넣고, 만두도 넣었다. 남기는 것 없이 싹 비웠다. 아침은 떡볶이로 충분했다. 그게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송편과 전이 아니라.
추석과 붙어 있던 주말, 외할머니와 이모네와 함께 리조트로 향했다. 저녁은 이모가 미리 예약해 두었던 코스 요리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다들 배가 빵빵하게 부른 상태로 객실로 향하는 도중 오락실에 들렀다. 소화도 시킬 겸 미니 볼링이나 한 판 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니 오락실에서 돈을 팡팡 쓸 수 있어서 좋다. 이모부와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천 원, 오천 원짜리 지폐를 아낌없이 꺼내 주셨고 온 가족이 돌아다니면서 게임을 시작했다. 이모부와 할머니와 나는 농구부터 한 판 시작했다. 농구를 끝낸 할머니는 엄마와 함께 총 게임 앞에 앉았다. 외계인을 총으로 무찌르는 게임이었다. 엄마와 할머니는 게임에 진심처럼 보였다.
미니볼링에선 팀을 나눠 작은 볼링공을 던지고, 스트라이크라도 나오면 환호성과 함께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모부는 내가 남긴 핀들을 처리해주셨고, 아빠와 엄마는 할머니에게 코칭 중이었다. 할머니는 열정적이었다. 모두 다 처음 해보는 것일 텐데도 무엇 하나 사양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그게 좀 대단해 보였다.
다음 날엔 등산을 갔다. 가족들 모두 명절에 등산을 하기는 처음이다. 목표는 정상이 아니었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와 이모가 올라갈 수 있는 만큼만 갔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등산이 으레 그렇듯 조금만 더 올라보자고, 더 가면 탑이 나오는데 거기까지만 갔다가 내려오자며, 쉬었다가 또 가면 된다고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와 이모를 응원하고 격려했다. 꽤 가파른 계단도 손을 붙잡고 올랐고, 가방에서 물을 꺼내 나눠 마셨다.
그리고 산의 중간 지점 정도에서 다시 돌아 내려왔다. 정상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함께 갈 수 있는 만큼 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누군가를 탓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같이. 그게 우리 가족에겐 명절이었다. 어떻게 이런 추석이 있을 수 있을까. 인생은 살아 볼 일이라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말했다.
코로나로 우리 가족뿐 아니라 다들 조금 다른 추석을 겪지 않았을까. 당신의 추석은 어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