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내가 처음 산 정상에 오른 건 스무 살의 여름이었을 거다. 조금씩 비가 왔고, 등산화 밑창으로 느껴지던 돌들은 온통 미끄러웠고, 짙어진 산의 색과 냄새, 스틱을 쥐던 손바닥의 감촉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을지로에서 급하게 구매한 30리터짜리 등산 가방을 메고 엉금엉금 산을 올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어느 순간부터는 두 다리에서 느껴지는 감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우리는 습기와 땀에 찌든 채 대피소에서 짧은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새까만 새벽을 가르고 천왕봉에 도착해 흐릿한 아침을 맞이했고 몇 장의 기념 사진을 찍었다. 첫 등산치고는 강렬하게 빡셌던, 그 산의 이름은 지리산이었다.
그 이후로도 이 년에 걸쳐 차례대로 세 개의 산을 더 올랐다. 태백산, 한라산, 소백산. 아무래도 지리산 첫 등산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터라 이쯤이야, 하고 넘어가게 된 부분도 있겠지만 이 년동안 매 방학마다 산꼭대기를 오르며 알게 된 건 내가 산을 오르는 시간을 꽤 잘 견디는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삼십 분 정도를 견디면 매 발걸음 순발력 있게 편평한 돌들을 찾아 디디는 것도, 몸의 무게를 이기고 계단과 비탈을 올라가는 것도 익숙해졌다. 점점 몸의 고통보다는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락하고 거대한 위요감을 기대하게 됐다.
혼자 산을 오르기 시작한 건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종일 시간을 쏟아붓고도 채우지 못한 마음의 부분들과 어디론가 빠져나간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방전된 채 산으로 가면 거기엔 일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만이 존재했고 다른 것들은 신경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꾹꾹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그래, 역시 아무래도 괜찮은 것들이 많아졌다. 나는 보통 그렇게 나를 채우러 산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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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자는 나와 지리산을 함께 등반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평소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도 노랑자도 일 년에 두어 번은 비행기를 타곤 했는데, 훌쩍 떠날 수 없는 시국이 계속되자 우리는 함께하는 등산을 계획했다. 우리나라는 쉽게 오를 수 있는 산들이 많기도 하고, 다시 가고 싶은 산들도 있고, 어쩌면 지금은 그게 잠깐 현실에서 잠깐 피해 있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지도 모르니까.
첫번째 산은 관악산으로 정했다. 살고 있는 곳과 가깝고 정상인 연주대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 첫 산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사당에서 출발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사당역에서 만나 국수를 먹고 김밥을 샀다. 누가 봐도 산을 가는 복장의 사람들을 따라 걸어가니 슬슬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시원하고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났다. 우리는 간단히 스트레칭을 한 뒤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관악산은 바위가 많은 산으로 예로부터 불의 기운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 기운은 무얼 보고 정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정상 옆의 불꽃 모양의 바위를 보자 정말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임금이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던데, 설마 왕이 이런 암벽을 손수 붙잡고 기어 올라갔을까. 나는 산을 오르는 내내 임금이 탄 가마를 들쳐메고 산을 올랐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뎌 가마가 기우뚱한다든가 받치고 있던 손을 놓친다든가 하면 아주그냥 바로 삼대가 멸족... 아무래도 못할 짓 같았다.
국기봉을 조금 지나쳐 오를 때까지는 간간히 뒤를 돌아보며 서울의 남쪽 모습을 점점 넓게 볼 수 있었다면, 전망대를 지나 본격적으로 능선을 타기 시작하면 거대한 산의 모습이 펼쳐진다. 공간이 무한히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가파른 경사를 올라갔다 내려가며 하나의 산등성이를 넘어갈 때마다 점점 정상과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연주대에 가까워지면 오랜 세월에 모서리가 둥글둥글 깎인 커다란 바위들이 턱턱 앞을 가로막는다. 온 몸으로 로프를 잡고 바위를 기어올라가면 마침내 연주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올라와 삼삼오오 앉아 있었다. 정상을 찍고 내려가는 것이 목표이긴 했지만 성취감보다는 개운함이 느껴졌다. 우리도 오이와 김밥을 꺼내들고 비탈진 바위에 앉았다. 잠깐 쉬었다 금방 내려가자.
서울대학교 공대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거리가 짧은 대신 엄청난 계단의 연속이었다. 내려가며 올라가는 사람들을 지나치는데, 계단이 많고 길이 덜 험해서 그런지 유독 아이와 함께인 사람이 많았다. 어떤 아이가 죽을상으로 너무 힘들어요.. 하면 함께 있던 어른이 원래 힘든거야~ 하며 전혀 쿵짝이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어떤 아이는 얼굴이 시뻘개져서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사부작사부작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오른다. 나는 조금만 더 오르면 돼, 하고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산을 내려와서는 노랑자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산을 다녀와서 먹는 밥은 언제나 달고 맛있다.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우고 나니 노랑자의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모두가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자주 산을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손으로 전부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겠지만, 그것들은 스트레스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꾹꾹 눌러 요약되었다. 노랑자의 아버지는 잘 뭉쳐진 스트레스를 가지고 산을 올라 차곡차곡 내려놓는 방법을 알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관악산을 내려오다 마주친 돌 무더기가 떠올랐다. 바위에서 시작해 손톱만큼 작은 돌멩이로 끝나는 수십 수백 개의 돌 무더기. 거기에는 아마 그와 비슷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관악산을 오르며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기 다양했지만 여러 명이 아닌, 조용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오르고 있던 사람들에게서는 비슷한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도시 안에서 쉽게 찾아와 생각을 정리하고 반복적으로 근육을 사용하며 어떤 종류의 짐을 내려놓고 갈 수 있는 공간. 아름답지만 빡빡한 이 도시에, 산이 많다는 건 정말 다행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