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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부분 Feb 21. 2022

영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영화>

 지금은 집에서 리모컨 하나로 영화를 틀 수 있지만, 어릴 때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동네 비디오 가게를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와야 했다.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비디오와 만화를 함께 대여해 주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만화를 자주 빌리러 갔으므로, 가는 김에 비디오 코너까지 쓱 구경하고 나오고는 했다. 비디오 테이프가 담긴 케이스들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 사이를 거닐며 둥글고 매끈한 비닐 커버를 손으로 훑으면 제목의 색깔이나 글씨체 같은 것만으로도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가 있어서 냉큼 빼들었는데 속이 비어 있을 때의 그 허망함이란. 비쭉거리면서 누가 빌려갔으면 거꾸로 좀 꽂아 놓을 것이지.. 하면서 거꾸로 꽂아 놓고 돌아서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에나 지금이나 나는 영화 보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감정 소모가 크기 때문이다. 영화가 잘 짜여 있을수록 그 세계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실제로 있을 것 같고, 마구 몰입해서 보다 보면 영화가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고 뉴스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힘들다. 애니메이션 영화이거나 SF, 판타지, 서사가 잔잔하고 극단적인 사건이 없는 장르의 영화들은 곧잘 보지만, 축축하고 피가 튀는 스릴러나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것은 영화관 쪽이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는 이유의 팔 할을 차지할 정도라고 할까.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좋다.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자취방에서 가까운 곳에 CGV가 있어서 애인과 심야 영화를 종종 보러 갔다. 어둡고 폭닥하고 커다란 공간, 조곤거리는 말소리, 적은 사람들, 고소하고 달큰한 팝콘의 향, 맥주, 얼음이 가득 든 콜라,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잡은 손이나 발밑을 보고 걷는 조심스러움,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그 안에서 특이하고 재미있는 이름을 찾아내는 것, 조금 지치고 졸린 상태, 다음 날 늦잠을 자도 괜찮다는 충만감, 밤안개와 새벽의 거리. 그런 것들이 좋아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좋아하는 애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나는 영화를 잘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아무래도 사건이 진행되려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기승전결, 긴장, 자극이 내겐 너무 크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서만 펼칠 수 있는 세계가 있고, 영화에서만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니까.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걸 좋아한다면, 그들과 배를 깔고 드러누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즐겨 볼까 한다.



 올해의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꼭 소개하고 싶은 영화는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해수의 아이>다. 요네즈 켄시의 ost를 찾다 발견한 뮤직비디오에서 출발해 영화까지 보게 되었는데, 스토리의 흐름보다 표현이 너무 좋아서 짧은 대여 기간 동안 여러 번 돌려 봤다. 여름을 기다리는, 영상미 추구형인 사람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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