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동네. 동네라고 하면, 빽빽한 아파트 단지보다는 작은 주택들과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복잡한 실타래처럼 골목길이 구불구불 얽혀있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가사를 떠올리면 아파트 단지와 단지 앞 상가가 아닌,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것 같은 골목, 가다 보면 작은 놀이터도 보이고, 낡은 담벼락과 길고양이들을 마주칠 수 있는 그런 곳이 떠오른다. 도회적이기보다는 어딘가 낡고 구시대적이지만 친근한 느낌이다.
나는 동네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할머니가 살던 동네가 떠오르곤 한다. 그곳은 이제 재개발로 모두 허물어져 이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내겐 영원히 할머니 동네로 기억될 곳이다.
할머니 동네는 낡은 주택가였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동네라서 '할머니 동네'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 이름이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엄청 낡은 동네였거든.
이제 모든 게 없어졌지만 나는 그곳의 길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정비되지 않은 거친 골목길에 들어서서 한 번, 두 번, 꽤 많이 꺾고, 오르막을 오르고, 심지어 계단마저 올라야 할머니 집이 나왔다.
주말에 할머니 집에 모여 짜장면을 시켜먹을 때면 나는 매번 신기했다. 이렇게 복잡한 동네를 어떻게 알고 배달을 하는 거지? 심지어 계단을 올라야 해서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타고 오지 못할 텐데, 배달시켜먹은 짜장면은 불지도 않고 늘 맛있었다. 아마 지금 로켓 배송을 시키면 쿠팡맨은 제법 난감할 거다. 차를 큰길에 세워놓고 한참을 올라와야 할 테니까.
아무튼, 주말마다 할머니를 찾아갈 때면, 동네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나와 함께 놀았다. 우리는 술래잡기도 하고 얼음땡도 했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과 곳곳에 있는 계단은 뛰놀기 좋아하는 어린애들에겐 최고의 무대였다.
할아버지는 종종 집 앞 계단에 앉아 놀고 있는 우리를 지켜봤고, 가끔 앞 집과 옆 집 할머니들이 함께 나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놀이가 끝나면 계단 꼭대기 집에 있는 친구네에 가서 간식도 먹었고, 골목 끝 주택 2층에 살고 있는 언니네에 가서 컴퓨터 게임도 했다.
때로는 동네 친구들과 모여 골목길을 탐험하기도 했다.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골목이 많아 꼭 보물찾기 하는 것 같은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골목으로 가면 할머니 집, 이 골목으로 가면 큰길이 나오고, 이 골목으로 가서 조금 더 꺾으면 중학교가 나왔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황두진 건축가가 쓴 '가장 도시적인 삶'에서 한국의 '상가 건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래된 상가 건축물들을 설명하는 그 책을 보며, 그렇게라도 기록된 삶과 건축물들이 내심 부러웠다. 할머니가 살았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아무도 사진을 남겨놓지 않았을 텐데. 저마다의 의미가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의미는 아무도 찾지 못하게, 찾을 수도 없이 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가 살던 동네에 지금 가족들이 살고 있다. 마치 할머니 동네가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곳엔 아파트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그 동네 그대로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같은 동네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 아니, '동네'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뛰어다녔던 그 동네가 아직도 선하게 그려지는데, 이제 그 동네는 내 머릿속에만 남았다. 동네 하나가 완전히 허물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게, 나는 지금도 어딘가 기분이 찝찝하다.
+ 오른쪽 집이 할머니 집이었다. 이런 사진을 많이 남겨둘 걸 두고두고 아쉽다.